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제 2 장 속죄와 성찬식

제 2 장 속죄와 성찬식 (p. 18 - 5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바울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라. -바울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 하리라. - 예수

<18:1>
속죄는 사람의 하나님과의 일치함을 예증하는 것이며, 그 일치함으로 사람은 신성의 진리, 생명, 그리고 사랑을 반영한다. 나사렛 사람인 예수님은 사람의 아버지와의 하나 됨을 가르치고 실증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때문에 그분에게 끝없이 충성하여야 할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명은 개별적이기도 했고 집합적이기도 했다. 그는 본인 자신을 위한 정당성에 입각해서뿐 아니라, 인간들에 대한 자비심에 입각하여, -즉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과업을 수행할 방법을 가르쳐 주고자, 일생의 과업을 올바로 수행하셨지만, 그들을 대신하여 그것을 행하셨거나 그들의 책무를 단 하나라도 면해주고자 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감각들의 인정된 증거에 대항하여, 바리새적인 교리와 관습에 대항하여 과감하게 행동하셨으며, 자신의 치유의 권능으로 반대하는 모든 자들을 반박하셨다.
<18:13>
그리스도의 속죄는 사람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것이지, 하나님을 사람에게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신성의 원리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화해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진리인데, 그것은 그 자신보다 더 높이 다다를 수 없다. 샘물은 그 근원보다 더 높이 올라 갈 수 없다. 진리인 그리스도는 어떠한 본성도 영원한 사랑으로부터 연유한 자신의 본성 이상으로 조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람에게가 아니고, 사람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었다. 사랑과 진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양과 적대관계에 있지 않다. 사람은 신성의 사랑을 넘어설 수 없으며, 그래서 스스로를 위해 속죄할 수 없다. 그리스도마저도 진리를 오류에 화해시킬 수 없다, 왜냐면 진리와 오류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예수님 가르침의 신성의 원리인 사랑에 대한 더욱 참된 의미를 가르쳐줌으로써 사람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도록 도우셨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 더욱 참된 의미가 사람을 영의 법칙, -즉 신성의 사랑의 법칙에 따라 물질과 죄와 사망의 법칙으로부터 구원한다.
<19:12>
주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비록 가족들 간에 불화를 야기하고, 물질적 믿음들에게 평화가 아닌 칼을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전부를 말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무엇이 질병과 죄와 사망을 파괴시킬 것인가를 정확히 선언하셨다.
참회와 고통의 모든 괴로움, 개심을 위한 모든 노력, 모든 선한 생각과 행위가 죄에 대한 예수님의 속죄를 이해하도록 돕고 그 효능을 촉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죄인이 기도하고 회개하기를, 죄짓고 뉘우치기를 계속한다면, 그는 속죄 -즉, 하나님과 하나 됨-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는 실천적인 회개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심중(心中)을 개혁하고 사람이 지혜의 의지를 행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실천에 관한 신성의 원리를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실증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조금도 관계가 없다. 만일 그분에게 불복종함 안에서 살고 있다면, 비록 하나님이 선하시지만 우리는 절대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
<19:29>
예수님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계명을 강조하셨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이 풀이 될 수 있다, 즉 너희는 생명을 필멸이라고 하는 어떤 믿음도 가져서는 안 된다; 너희는 악을 알아서는 안 된다, 왜냐면 유일한 생명, -즉 선이신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셨다. 그는 종국에는 교리의 형식들, 즉 인간의 이론들에게는 아무런 존경도 바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영들이 아닌 영에 의해 그가 감동되는 대로 행동하고 말씀하셨다.
<20:6>
의식(儀式)을 중시하는 사제와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역사가 새로운 역법(曆法)을 만들었고,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의식적(儀式的)인 예배도 설립하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고, 성직자를 지원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긴 기도를 할 수 있으면서도, 아직도 관능의 만족을 구하고 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셨다; 그는 필멸적인 믿음의 오류를 아셨다, 그리고 “그가 맞은 채찍[오류를 거부함]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고 거부”되었으나, 저주를 축복으로 갚아주며, 인간들에게 그들 자신의 반대되는 것, 즉 하나님의 본성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오류가 진리의 권능을 느끼게 되었을 때, 채찍과 십자가가 그 위대한 스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성의 명령을 복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이 죄로부터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다시 되돌아 반복함을 덜어 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물질적 믿음은 영적 사실이 내포하는 것을 인정하는데 있어 더디다. 진리가 모든 종교의 중심이다. 그것이 사랑의 영역으로 확실하게 들어감을 명령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 또한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자”라고 썼다, 즉 물질적 자아와 감각을 제쳐놓고, 신성의 원리와 모든 치유의 과학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21:1>
진리가 당신의 일상생활과 대화에서 오류를 극복하고 있다면, 당신은 드디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 믿음을 지켰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면 당신은 더 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진리와 사랑과의 하나 됨 안에서의 우리의 참여함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선함과 고통과 승리로 인하여 그들이 그의 조화와 보상에 도달할 것을 기대하며, 노력하고 기도하기를 계속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제자가 영적으로 전진하고 있다면, 그는 들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물질적 감각으로부터 돌아서며, 영의 불멸의 것들을 향하여 본다. 만일 정직하다면, 그는 시작부터 진지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길을 기쁨으로 마칠 때까지 바른 방향으로 날마다 조금씩 진보해 나갈 것이다.
만일 내 친구들은 유럽으로 가고자 하고, 반면에 나는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에 있다면, 우리는 함께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참조해야 할 서로 다른 시간표와 좇아야 할 서로 다른 길을 가진다. 우리의 길들은 바로 처음부터 갈라졌으며, 우리는 서로 도울 기회가 거의 없다. 반대로 만일 내 친구들이 내가 가는 길을 좇는다면, 우리는 같은 철도 안내원들을 가지게 되고 우리가 가지는 피차의 흥미는 동일할 것이다; 또는 만일 내가 그들이 가는 여행길을 택하게 된다면, 그들이 나를 돕게 될 것이고 우리의 동반관계는 계속 될 것이다.
<21:25>
물질에 대해 공감하게 되면, 세속적인 인간은 오류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고, 그 쪽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그는 재미를 찾는 여행을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여행자와 같다. 일행은 매혹적이고 즐거움은 흥분할 만하다. 엿새 동안 태양을 좇다가, 일곱 째 날에 만일 그가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상상할 수만 있다면 그는 만족해하며 동쪽으로 향한다. 이윽고 자신의 갈지자 행보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그는 보다 현명한 어떤 순례자의 여권을 빌리고자 하는데, 이것의 도움으로 올바른 길을 찾아 따를 것이라고 생각 한다.
<22:3>
죄와 용서에 대한 희망의 사이를, -이기심과 끊임없는 퇴보를 야기하는 관능성 사이를- 마치 시계추처럼 오가면 우리의 윤리적 진보는 더디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요구에 눈을 뜨게 되면, 인간들은 고통을 겪는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마치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격렬한 노력들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통하여 성공의 관을 쓰게 된다.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생명과 사랑의 요구인데,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올 때까지 지키고 있어라!” 네가 받을 보상을 기다리라, 그리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만일 당신의 노력이 잘못될 가능성으로 시달림을 받고, 현세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해도 오류로 돌아가지도 말고 경주에서 뛰기를 귀찮아하는 사람이 되지도 말라.
전쟁의 포화가 가라앉으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룬 선(善)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당신이 받을 자격이 있는 만큼 받게 될 것이다. 사랑은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 왜냐면 사랑은 우리가 시험을 받고 정화되어야 하리라는 것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오류로부터의 최종의 구원은, 그로써 우리가 불멸성과 무한한 자유와 죄가 없는 감각 안에서 즐기는데, 꽃으로 수놓아진 길을 통해 도달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수행 없이 다른 사람의 대리 노력에 신앙을 편승시킴으로써 도달되는 것도 아니다. 분노함이 정당하다거나 신성(神性)이 인간의 고통에 의해 노염이 가라앉혀진다고 믿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2:30>
정의는 죄인의 개심을 요구한다. 자비는 정의가 승인할 때만 죄를 탕감해준다. 복수는 허락될 수 없다. 가라앉혀졌을 뿐인 분노는 파괴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만족시켜 준 것이다. 지혜와 사랑은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많은 희생을 요구 할지 모른다. 한 번의 희생은, 그것이 아무리 클 지라도 죄악을 빚을 치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속죄는 죄인 측에게 끊임없는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분노가 그분의 사랑스런 아들 위에 발해져야만 한다는 것은 신성적인 면에서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 이론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다. 속죄는 신학에서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것의 과학적 설명은 고통이란 진리가 파괴하는 죄 많은 감각의 하나의 오류라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죄와 고통 모두가 영원한 사랑의 발아래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23:12>
유대교의 랍비 교의(敎義)의 전통에 의하면, “강한 신앙 안에서, 하나의 교리를 택한 사람은 그 자신 안에 거하는 성령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설교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는 성경 말씀의 강력한 꾸짖음을 받는다. 신앙은, 만약 그것이 단순한 믿음이라면, 고정점이 없이 존재와 무존재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 영적인 깨달음에까지 발전한 신앙이 영으로부터 얻은 증거인 바, 이것이 온갖 종류의 죄를 꾸짖고 하나님의 주장을 확립한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와 영어에서의 신앙이란 말과 그에 상응하는 말들은 다음의 두 가지, 즉 신뢰한다는 것과 신뢰를 할만 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종류의 신앙은 자신의 복지를 다른 이들에게 맡긴다. 다른 종류의 신앙은 신성의 사랑과 “자신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는 방법을 깨닫는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는 맹목적 신앙의 무력함을 나타내지만; “믿으라...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명령은 스스로를 의지할 수 있는 신뢰 할만 함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영적인 깨달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신뢰하여 맡긴다.
<23:32>
히브리어의 동사로 믿다는 말은 동시에 확고하다 또는 한결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깨닫고 실천되는 진리와 사랑에 확실히 적용된다. 오류 안에서 확고함이 죄와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결코 구원해주지 못할 것이다.
<24:4>
성서 원전(原典)을 밝히 앎, 그리고 (교권제도에 의해 확립되었고, 때로는 인간의 최악의 감정에 의해 유발되는)인간적 믿음들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마음씨가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깨닫는 길을 열어주고, 성경으로 하여금 인생의 海圖가 되도록 만들어주는데, 이 해도에 진리의 부표와 치유의 조류가 그려져 있다.
“주의 팔”의 드러남을 본 사람은 우리의 보고를 믿을 것이며, 갱생함으로써 생명의 새로움 안으로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속죄에 참여함이다; 이것이 깨달음인 바, 예수님이 그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승리하셨다. 속죄에 대한 통상적인 신학적 견해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될 때가 머지않았는데, -그 변화는 예정설과 내세의 형벌에 관한 통속적 의견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변화만큼 근본적인 것일 것이다.
학자적인 신학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처형을 용서를 구하고 기꺼이 용서받고자 하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용서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로 여기고 있는가? 심령술이, 영들이 지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로서의 사망 후 물질적인 예수의 나타남 만을 위해 예수의 죽음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둘 모두와 다를 수밖에 없다.
<24:27>
십자가상의 처형의 효력은 그것이 인류를 위해 실증했던 실용적인 애정과 좋은 것 안에 있다. 진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생존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님으로 하여금 무덤을 이기도록 해주었다는 것을 볼 때까지는, 그 분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부활 후에는, 믿지 않았던 도마까지도 진리와 사랑의 위대한 증명이 얼마나 완벽한 것인지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되었다.
<25:3>
피의 영적 핵심은 희생이다. 예수님의 영적 봉헌의 효험은 인간의 피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의미로써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무한하게 더 위대하다. 예수님의 물질적인 피는 죄를 씻어내는 효과에 있어서, 그것이 “저주 받은 나무”에서 흘려 내리던 때가 그가 자기 아버지의 일을 하느라 일상적으로 돌아다닐 때 그의 혈관 안을 흐르던 때 이상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참된 살과 피가 그의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신성의 생명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신성의 원리가 어떻게 병자를 고치고, 오류를 쫓아내며, 사망을 이기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실증으로써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근원이 덜 영적인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하나님의 이상을 더 잘 표현하셨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복종으로써, 존재의 원리를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영적으로 실증하셨다. 따라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들을 지키라.”라는 훈계의 말씀에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죄와 질병에 대한 그의 다스림을 실증하셨지만, 그 위대한 스승께서는 결코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신앙심에 대한 필수적인 증거를 보여야 하는 것으로부터 면제해 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이 그가 하셨던 것처럼 이 권능을 실증하고 그것의 신성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그들을 지도하기 위해 일하셨다. 스승께 대한 맹목적 신앙과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감정적 애정만으로는 절대로 우리를 그분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가서 그분처럼 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해 수행하셨고 고통을 받으셨던 위대한 축복들을 활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통해 나타내졌다.
<26:1>
우리가 예수님을 받들어 섬기고, 그가 인간들을 위해 하셨던 - 즉 말 없는 고뇌 안에서 우리를 위한 길을 개척하는 가운데, 영광의 보좌에 이르는 그의 사랑의 좁은 길을 홀로 밟으며 하셨던 - 일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마음이 넘친다 해도, 우리가 그의 명령을 신실하게 따른다면, 예수님은 그 어느 한가지의 경험으로부터라도 우리를 면제해 주시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가 신성의 사랑을 통하여 구원될 때까지는, 그분 사랑에 대한 그들의 실증에 비례하여 마셔야 할 비탄으로 가득한 노력의 잔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자신의 말씀들에서 암시한 바 있는 영이었다. 이 그리스도, 즉 사람인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신성적인 그의 본성, 즉 그를 움직였던, 하나님 뜻에 순종함이었다. 신성의 진리, 생명, 그리고 사랑이 예수님에게 죄와 질병과 사망을 다스리는 권위를 주었다. 그의 사명은 성스러운 존재의 과학을 드러내는 것, 즉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그분이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는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음악가는 이론뿐 아니라 연습에 의해 학생에게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그가 가르치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실연(實演)한다. 예수님의 진리를 가르치심과 행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할 만큼의 큰 희생을 수반하였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죄 없는 생애, 그리고, 사망을 이기는 권능의 실증에 대한 귀중한 의미였다. 그 분은 그의 행위로써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병, 죄와 죽음을 파괴한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26:28>
우리의 주님은 단순한 이론이나 교리나 신앙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가 가르치시고 실천하셨던 것은 모든 실재하는 존재에 관한 신성의 원리이었다.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증명은 종교와 예배의 어떠한 형식이나 체계가 아니었고, 생명과 사랑의 조화를 이루어 내는 크리스천 사이언스이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메시지를 보내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의 물음이 필요 없도록 증명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다른 말로 하면: 요한에게 신성의 권능의 실증이 무엇인지 말하라, 그리하면 그는 즉시로 하나님이 메시아의 사역 안의 권능이시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7:10>
생명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처형 후 “너희가 이 성전(몸)을 헐라. 내(영)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자신의 과학적 말씀을 철저히 지켜서 다시 나타나심으로써 증명하였다. 그것은, ‘나 -생명과 본질과 우주의 이지- 는 파멸되도록 되어있는 물질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우화는 생명을 죄악과 사망과는 절대로 뒤섞지 않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과학의 도끼를 물질적 지식의 뿌리에 놓아두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즉 생명이 물질 안에 있다거나 그것으로부터 연유했다는 잘못된 범신론적 교의를 찍어 내버릴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어느 한 때 70명의 제자들을 내보내시기도 했지만, 겨우 열한 명만이 바람직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전통에 의하면 그에게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못한 이삼백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많아도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 그들의 주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27:28>
그리스도를 추종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왜 그 분이 설립하러 오신 본질적 종교를 거부하는 것인가? 예수님을 박해하던 자들은 바로 이 점에 가장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그들은 그를 물질의 처분에 맡기려고 했고, 그리고 어떤 가상의 물질적 법칙을 따라 그를 죽이려고 노력하였다.
<28:1>
바리새인들은 신성의 뜻을 알고 가르친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저해했을 뿐이다. 심지어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까지도 그의 길을 막았다. 만약 주님이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진리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는 십자가 처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영을 물질의 장악 하에 두려는 결단이 진리와 사랑의 박해자이다.
사람이 교회의 안이나 밖에 있는 모든 선한 것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말로 하는 것보다는 실증에 더 기반을 둔다. 양심상 우리는 성장해서 이미 벗어나버린 믿음들에 매달려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죽음이 없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원리를 더욱 더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병자들을 고치고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근원이나 성격이나 일이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 물질적 세상은 그의 특성 가운에 어느 부분도 올바로 가늠하지 않았다. 그의 의로움과 정결함마저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탐식가(貪食家)이고 부정한 자들의 친구이며, 베엘제블이 그의 보호자라는 말을 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스도교의 순교자여, 이것을 기억하라, 즉 만일 당신이 당신 주님의 발에 신는 신발 끈을 풀기에 적합하다는 것이 밝혀지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을! 의로움으로 인해 박해 받는 것이 과거의 일이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분파들이나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평화를 이루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종교의 본성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류는 스스로를 반복한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예언자와 사도와 제자가 부닥쳤던 시험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진리의 모든 선구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28:32>
사회는 너무 많은 동물적 용기로 넘치고 도덕적 용기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오류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어야만 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과 타인들 안의 죄와 씨름해야만 하며, 그들이 그들의 길을 다 갈 때까지 이 전쟁을 계속해야만 한다. 그들이 신앙을 지킨다면, 그들은 환희의 관을 쓰게 될 것이다.
<29:7>
그리스도교적인 경험이 올바름을 믿고 그릇됨을 믿지 않도록 가르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박해를 받을 때에 더욱 성실하게 노력하도록 요구한다, 왜냐면 그럴 때일수록 우리의 노력이 한층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기희생에 대한 보상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대단한 것이다.
푸불리우스 렌툴루스가 로마의 고관들에게, “예수의 사도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라고 보고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유일한 창조자라는 영광스러운 인식에 도달한다. 동정녀 모친이 하나님의 이 아이디어를 잉태하고, 그녀의 이상을 예수, 다시 말해 여호수아 즉 구세주라 이름 하였다.
마리아의 영적 감각이 밝혀준 것이 물질적 법칙과 그것의 생식(生殖)의 질서를 침묵시키고, 진리의 계시에 의해 자신의 아이를 낳음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아버지임을 실증하였다. 성령 곧 신성의 영이, 존재가 영이라는 온전한 인식으로써 동정녀 모친의 순수한 감각을 보호하였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성의 원리인 하나님의 가슴 안에 영원히 거하는 아이디어이며, 처음에는 희미하게 발생했지만 여인이 이 영적인 아이디어를 깨달았던 것이다.
<29:30>
하나님의 소생으로서의, 즉 영의 아이디어로서의 사람은, 영이 조화롭고 사람은 영원하다는 불멸의 증거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하나님과의 의식상(意識上)의 영적 교섭의 소생이었다.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인 아이디어이었고, 사랑의 과학, 아버지 즉 신성의 원리를 실증할 수 있었다.
<30:5>
예수님은 신성의 영인 그리스도를 한량없이 타고났음에도, 여인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육신을 통한 강림은 마리아의 지상에서의 상황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게세마네에서와 갈보리에서의 고투를 설명해주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중재자, 즉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근원과 탄생이 인간의 관례와 전연 별개의 것이었더라면, 예수님은 인간들의 마음에게 “길”로 인식되지 못했을 것이다.
랍비와 제사장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눈에는 눈”, 그리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자기의 피도 흘려지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뜻의 새로운 집행자인 예수님은 그러하지 아니하였고, 사랑의 신성의 법칙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그것을 저주하는 사람들 까지도 축복한다.
진리의 개별화된 이상(理想)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는 랍비의 교의적(敎義的)인 오류와 모든 죄와 질병과 사망을 꾸짖기 위해, 즉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리켜주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전 생애를 통해, 혼의 소생과 물질적 감각의 소생의 다른 점을 보여줌으로써, 즉 진리의 소생과 오류의 소생의 다른 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이상이 실증되었다.
<30:26>
만일 혼이 통제권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물질적 감각에 대해 충분히 승리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해 염증을 낼 것이며, 죄가 어떠한 모습으로 가장하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꾸짖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말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축복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 선택할 수 없으며, 예수님이 가르치신 방법대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만 한다. 온유함과 능력 안에서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설파하셨다. 자만함과 두려워함은 진리의 기치를 들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맡기지도 않으실 것이다.
<31:4>
예수님은 어떤 육신적인 관계도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고 하셨다. 다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친이며 형제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물으셨다.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영, 하나님을 유일한 창조자로, 그러니까 모두의 아버지로 인정하셨다.
그리스도 교인들을 위한 임무 일람표의 첫째로, 그는 진리와 생명의 치유 권능을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는 죽은 의식(儀式)들에는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행위 안에서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를 “부활이요 생명”으로 만드는 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 즉 실용적인 진리이다. 그의 귀한 교훈에 복종할 때, 즉 우리가 이해하는 한까지 그의 실증을 따를 때, 우리는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떡을 함께 먹으며, 그의 정결함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종국에는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신성의 원리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 안에서 그와 함께 앉아서 쉬게 될 것이다. 바울이 뭐라고 말했는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31:25>
예수님은 당대(當代)의 물질주의에 대하여 언급하며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라고 하셨다. 영의 과학에 따르게 될 박해를 내다보며 다시 말씀하기를: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라고 하셨다.
<32:3>
고대 로마에서는 병사에게 자신의 장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런 맹세를 의미하는 라틴말은 세크라멘텀(sacramentum) 이며, 우리의 영어 말 세크라멘트( sacrament 성찬식)은 그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손님 각자에게 포도주 잔을 돌리는 것이 고래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성찬식은 로마 병사의 맹세를 기념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주님의 잔은 잔치 때나 유태인들의 의식에 쓰였던 포도주도 아니었다. 그 잔은 그의 고통에 찬 경험, - 신성의 명령에 대한 성스러운 복종함 안에서 순종하였지만 그가 그로부터 지나가버리기를 기도했던 그 잔- 을 나타낸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가지고 축복하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받아먹으라 이것이 나의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고 감사드린 후에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모두 마시라 하시더라.”
성찬식이 빵과 포도주의 사용으로 한정된다면 그 참된 영적 의미는 상실되고 만다. 제자들은 이미 식사를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빵을 주셨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는 어리석은 짓이었겠지만, 그러나 영적 의미에서는 그것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그는 더욱 밝고 영적인 관점으로 그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물질적 감각들로부터 물러나셨다.
<32:28>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 전날 밤, 니산의 달에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유월절은, 하루가 끝날 무렵에 드는 서글픈 만찬이었던, 어두움이 서둘러 둘러싸고 내리던 영광스러운 생애의 황혼녘의 애처로운 행사이었다. 그리고 이 만찬이 예수님의 의식주의(儀式主義), 즉 물질에 대한 양보를 영원히 끝막음하는 것이었다.
<33:3>
그의 추종자들은 슬픔에 잠겨 침묵하는 가운데 그들의 주님이 배반당할 것을 예상하며 하늘로부터 온 만나를 같이 먹었는데, 그것은 그 옛날 황야에서 박해받던 진리의 추종자들에게 먹여주던 것이었다. 그들의 빵은 참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었다. 그것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오류를 내어 쫓는 영적 존재의 위대한 진리이었다. 그들의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전에 설명하셨고, 지금은 이 빵이 그들에게 영양을 주고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집집마다 이 빵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다른 이들에게 이것을 떼어주고(설명하고) 다녔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그들 자신들을 위로해주고 있는 것이다.
영적 존재에 관한 이 진리를 위하여 그들의 주님은 폭거를 겪고 그의 비통의 잔의 찌꺼기까지 비워야하는 참이었다. 그는 그들을 떠나야만 했다. 영원한 승리의 위대한 영광이 그를 보호하는 가운데, 그는 감사를 드리고 말씀하기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하셨다.
그분 안의 인간적 요소가 신적 요소와 다툴 때 우리의 위대한 스승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셨다, 즉 육신이 아닌 영이 나를 통해 표현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영적 사랑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즉 진리를 위해서 준다. 그것은 원수들을 축복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며 오류를 쫓아내고 범죄 함과 죄악들로부터 죽은 자들을 일으키며, 가난한 자들, 즉 마음이 온유한 자들에게 복음을 설교한다.
<33:27>
그리스도교인들이여, 당신들은 그의 잔을 마시는가? 당신들은 새로운 언약의 피, 즉 하나님께 대한 새롭고 한층 더 높은 깨달음에 따라오는 박해를 나누는가? 만일 그러지 않다면, 당신들은 예수님을 그의 잔을 통해 기념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기억하며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기꺼이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십자가를 메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원리를 위해 버리는가? 그렇다면 오류를 내어 쫓고 육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진리가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이는 대신, 왜 이 영감이 죽은 의식에 속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리스도, 즉 진리가 실증을 통해 우리에게 와 계신다면, 다른 어떠한 기념의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증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어떤 친구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왜 우리가 그 친구를 위한 추모식을 필요로 하겠는가?
<34:10>
단 한번만이라도 성찬식에 참예한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고통을 기념하고 그의 잔을 마셨다면,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대변혁을 가져왔을 것이다. 물질적 상징들을 통하여 그를 기념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십자가를 들어 메고,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며, 가난한 자들, -즉 잘 받아들이는 생각- 에게 그리스도, 즉 진리를 설교한다면, 그들은 지복천년이 오도록 할 것이다.
제자들이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통해, 그들은 더욱 영적이 되고 주님이 가르치셨던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부활은 또한 그들의 부활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영적 둔함과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부터 무한한 가능성들에 대한 인식으로 고양시키도록 그들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이러한 촉진을 필요로 하였다, 왜냐면 그들의 친애하는 주님은 곧 실재성의 영적 영역 안에서 다시 일어날 것이며, 그들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어 승천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신실함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는 그 이후 승천이라고 불려오는 그 변화를 통해 사라지게 될 것이다.
<34:29>
우리 주님의 최후의 만찬과 갈릴리 바닷가의 기쁨에 넘친 만남에서 밝은 아침 시간에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그의 마지막 영적 조찬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의 침울함은 영광으로 바뀌었고 그의 제자들의 비탄은 참회로 바뀌었다, 즉 속마음은 연단되었으며 자존심은 책망을 받았다. 어둠 속에서의 자기들의 수고의 헛됨을 확신하고 그들의 주님의 목소리에 깨어나서, 그들은 그들의 방법을 바꾸었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돌아섰으며, 그리고 그들의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다. 새롭게 시간의 연안에서 그리스도 즉 진리를 인식했을 때, 그들은 필멸적인 감각, 즉 물질 안에 마음을 장사지낸 상태로부터 어느 정도나마 영으로서의 생명의 새로움 안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35:10>
새로운 빛의 새벽에 우리의 주님과 함께 하는 이 영적 만남이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들이 기념하는 조찬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현을 더 잘 받아들이고, 신성의 원리 즉 사랑과 조용히 교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즉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인다. 그들은 그들 주님의 사망을 극복하심과, 사망 후 육신 안에서의 시련과, 그 시련이 인간 시련의 본보기가 됨, 그리고, 그가 물질적 시계(視界)를 벗어나 올라가셨을 때 물질, 즉 육신을 초월한 그의 영적이고 최종적인 승천을 축하한다.
우리의 세례는 모든 오류로부터의 정화이다. 우리의 교회는 신성의 원리, 즉 사랑 위에 세워진다. 우리는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이 될 때만, 즉 사랑의 열매를 맺음에 의해서, - 즉 오류를 내어 쫓고 병든 자들을 이를 고침에 의해서 우리가 진리인 생명에 도달하고 생명인 진리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에만 이 교회와 연합할 수 있다. 우리의 성찬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의 영적 교섭이다. 우리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이다. 우리의 잔은 십자가이다. 우리의 포도주는 사랑의 영감으로, 우리 주님이 드셨고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들라고 권하셨던 것이다.
<35:30>
사랑의 의도는 죄인을 개심 시키는 것이다. 만일 죄인에 대한 지상에서의 형벌이 그를 개심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면, 착한 사람들의 천국이 죄인에게는 지옥이 될 것이다. 정결함과 애정을 경험으로 알게 되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다른 세상으로의 변환을 통해서 진리와 사랑의 축복받은 무리들 안에서 절대로 축복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죄악에 대한 사랑의 불꽃을 끄기 위해서는 사망 전 또는 후의 충분한 고통이 필요함을 신성의 과학이 드러낸다. 죄에 마땅한 형벌을 면제하여 준다는 것은 진리가 오류를 용서해주는 것이 될 것이다. 형벌로부터 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면 정의는 자비의 시녀이기 때문이다.
<36:10>
예수님은 그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보상을 메마른 생명들에게 부어줄 수 있도록 수치를 견디셨다. 지상에서 받은 그의 보상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그의 십자가의 그림자 아래 침묵의 고뇌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몇 명의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다. 물질적 세대에서의 영성에 대한 세속적 가치,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관능성 사이에 있는 대단히 먼 윤리적 거리가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세속적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호의를 사게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기적이고 한정된 마음은 정의롭지 못할지 모르지만, 한정되지 않은 신성의 마음은 자비에 대해서 뿐 아니라 정의에 대해서도 불멸의 법칙이다. 죄인들이 무덤에 가기 전 이쪽에서 그들의 충분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이 의로운 사람들에게 그들의 충분한 보상을 주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똑 같이 불가능하다. 사악한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의 범죄들에 대하여 만족은 느끼다가 갑작스레 용서를 받고 천국으로 밀어서 들여보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거나 또는 사랑의 손이 우리의 선한 행동을 위한 노력의 대가로 우리에게 오직 고통과 희생과 십자가를 짐과 수많은 시련과 우리의 동기에 대한 조롱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36:30>
종교의 역사는 의롭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의로운 사람들이 받는 고통 안에서 스스로를 반복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란 이름의 믿음을 파괴하는 정의의 법칙을 간과하실 수 있는 것인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에 있어서도 죄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과학이 가르쳐주고 있지 아니한가? 죄를 범하는 사람은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다시 그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37:5>
역사는 고통의 기록들로 꽉 차있다.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인간들은 헛되이 진리를 총검이나 화형으로 죽이려고 노력하지만, 오류는 단지 영의 칼날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순교자들은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한 단계를 다른 단계와 연결시키는 인간 연결 고리이다. 그들은 이 땅의 선각자들로서, 물질적 감각의 분위기를 깨끗이 하고 순화하며 순수한 이상들로 인류사회를 가득 채운다. 올바르게 행함을 의식(意識)함이 그것 자신의 보상을 가져온다; 하지만, 전쟁의 포연가운데서는 공로가 보이지도 않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진가를 인정받지도 못한다.
말로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길들에서 그분을 본받기를 그리고 그분의 막강한 사역들을 따라하기를 배우게 될까? 그 의로운 분의 순교를 초래했던 사람들이 그 분의 성스러운 생애를 골자를 빼버린 교의적(敎義的) 강령으로 기꺼이 전환시키고자 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인들이 그 생애의 좀 더 실제적으로 유용한중요성을 취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진리와 생명의 실증, 즉 건강과 거룩함의 실증으로 주님의 본보기를 어느 정도까지 따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그것은 모든 어린이, 남자, 여자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분의 추종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그분이 명하신 바대로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이 절대적인 명령들을 들으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병든 자를 고치라!”
<37:32>
왜 이 그리스도의 요구가 인류로 하여금 그리스도적인 노력을 하도록 분발시키는 데 있어서 그렇듯 작은 영감을 가지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이 명령이 단지 특정한 기간 동안만, 그리고 선택된 수의 추종자들에게만 의도된 것이었다고 확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은 예정설이라는 옛 교리, -즉 소수만 구원을 받게 되어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교리 -보다도 차라리 더 유해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교리들에 의해 생성된 인간들의 무기력 상태가 신성의 과학의 요구에 의해 깨어지게 될 때에야 그것이 고려될 것이다
<38:10>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셨다. 누가 그를 믿는가?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너희들에게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하지 않고 그들 즉 다가오는 모든 시대의 “믿는 자들”이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손이라는 단어는,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라는 말씀에서처럼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영적 권능을 표현한다 ; 그렇지 않다면 치유가 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때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해서” 믿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육신적 감각들의 쾌락들은 거의 경험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고통들은 자기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죄의 결과였다. 영원한 그의 영적 자아인 그리스도는 결코 고통을 받지 않았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을 그려내셨다. 그는 신성의 사랑의 영적 아이디어인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어내셨다. 감각의 만족이나 쾌락만을 위해 살면서 죄와 자신에 대한 믿음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실질적으로 말씀하기를,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그는 물질적 감각들이 진리와 그 치유 권능을 내쫓는다고 가르치셨다.
<39:1>
우리의 주님은 자신의 인정받지 못한 위대함에 대한 비웃음을 겸손하게 대면하셨다. 그가 받았던 것과 같은 모욕을 그의 추종자들도 그리스도교의 최후 승리 때까지 견뎌내야 할 것이다. 그는 영원한 영예를 획득하셨다. 그는 세상과 육신과 모든 오류를 이기셨고, 그러함으로써 그것들의 무존재성을 증명하셨다. 그는 죄와 병과 사망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모든 오류가 파괴될 때까지, 즐거움들과 승리들뿐 아니라 시험들과 자기부인들을 겪어야만 한다.
혼이 육신 안에 있다는 교육된 믿음이 인간들로 하여금 죽음을 친구로, 즉 필멸성으로부터 빠져나와 불멸성과 천국으로 가는 디딤돌로 여기도록 한다. 성경은 사망을 적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예수님은 사망과 무덤에 굴복하는 대신 그것들을 극복하셨다. 그가 “길”이셨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사망이 살아있는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만 하는 문턱이 아니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사도는 소리쳐 말했다, -
즉, 지금 사람들이 미래 세상의 구원이나 안전에 대비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이 영과 생명에 있어서의 그 구원을 체험할 때라는 의미이다. 지금이 이른 바 물질적 고통과 물질적 쾌락이 없어져야만 할 때이다, 왜냐면 둘 모두 과학 안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주문(呪文)을 깨뜨리기 위해서 인간들은 진정한 아이디어를 얻어야만 하고 실제로 존재하고 우주를 조화로이 다스리는 신성의 원리를 얻어야만 한다. 이런 생각은 더디 이해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기간은 승리들뿐 아니라 의심들과 좌절들을 수반한다.
<39:31>
죄로부터 오는 쾌락을 믿는 한 누가 죄를 실행하는 것을 막을 것인가? 인간들이 악이 쾌락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한 번 인정하게 되면,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돌아서게 된다. 생각으로부터 오류를 제거하라, 그리하면 그것은 결과 안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앞서가는 사상가와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은 그리스도적 치유와 그것의 과학이 미치는 범위와 추세를 인지하고 그것들을 지지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그만 가라. 내가 편리한 때에 너를 부르리라.”고 말할 것이다.
<40:8>
신성의 과학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저울을 조정한다. 과학은 먼저 형벌을 초래한 죄를 제거함으로써만 형벌을 제거한다. 이것이 신성의 용서에 대한 나의 판단인 바, 이것이 하나님의 죄악을 파괴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만일 “생명이 있는 한은 희망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과 반대도 사실일 것이다, 즉 죄가 있는 한 심판이 있다. 다른 사람이 받아준 고통이 우리 자신의 책임을 줄여줄 수 없다. 사보나롤라의 순교가 그의 무자비한 적들의 범죄를 조금 더 가볍게 만들었던가?
예수님이 고통 당하셨던 것이 정당했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면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진리의 권능을 보여줄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위대하고 선한 생애도 죄인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면, 하물며 진리의 그보다 작은 사도들은, 진리와 사랑의 개선문을 통해 그분과 함께하는 공동체에 들어감을 즐거워하며, 투덜거림 없이 인간적 잔인성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우리 천상의 아버지, 즉 신성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 주님과 그 사도들의 본보기를 따를 것을 요구하시며 단순히 그의 인격을 경배하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신성의 섬김(service)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일상의 행위가 아닌 공중의 예배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40:31>
그리스도교의 본성은 평화롭고 축복을 받는 것이지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희망의 닻은 물질의 장막을 뛰어 넘어 예수님이 우리 앞서 통과하신 하나님의 존전(尊前) 안으로 던져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 물질을 뛰어넘는 진전은 의인들의 즐거움들과 승리들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슬픔들과 고통들을 통해서 올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주님처럼, 우리는 존재에 대한 물질적 감각으로부터 떠나 영적 감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41:8>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피가 흐르는 발자국을 낼지라도 조용하게 걷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내생에서 그들은 그들이 지금 뿌리는 것을 거둘 것이다. 제멋대로 하는 위선자들은 이생에서 꽃으로 덮인 길을 걸을지 모르지만, 그가 영속적으로 황금률을 어기며 치러야 할 형벌을 피할 수는 없다.
오류를 내어 쫓고 병든 사람들을 고침으로 예수님이 주었던 진리와 생명과 사랑에 대한 증명이 그의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교회에서 이런 치유의 실증은 십자가처형 후 약 삼 세기가 지나며 일찌감치 사라졌다. 그 어떤 고대의 철학 학파나, 약물학(藥物學)이나 스콜라 신학도 절대적 과학의 신성의 치유를 가르치지도 실증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이해되기 전에 받게 될 반응을 예상하셨다, 그러나 이 예상이 그를 막지는 못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그의 사명을 완수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으셨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의 사도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여전히 그들의 선행을 행하며 돌아다녔는데, 그들은 그것 때문에 중상을 당하고 투석(投石)질을 당했다. 예수가 가르쳤던 진리를 장로들은 코웃음을 쳤다. 왜인가? 왜냐면 그것이 그들이 기꺼이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것 이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국가적 신격(神格)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그들의 시대로부터 우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악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할 수 있는 사도를 결코 만들어 낸 적이 없다.
<42:1>
예수님의 생애는, 신성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한 반면에,
제사장과 랍비들은 하나님은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하는 막강한 주권자라고 주장하였다.
유태인들의 신학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았다.
사망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은 이로울 것이 없다. 그것은 생명이나 진리를 명백하게 드러낼 수 없다. 사망이란 하나의 필멸적인 꿈이라는 것이 종국에는 밝혀질 것인데, 그것은 암흑을 통해 와서 광명으로 사라진다.
그 “슬픔의 사람”은 보수나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었고 하나님의 승인으로 확실히 보증을 받은 처지였지만, 예루살렘으로의 짤막한 개선과 같은 입성은 십자가 밑까지 슬프게 그를 따른 몇 안 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로부터 버림을 받음으로 이어졌다.
<42:15>
하나님 권능의 위대한 실증자의 부활이 육신과 물질에 대한 그의 최후 승리의 증거이었으며, 신성의 과학에 관한 완전한 증거, - 필멸의 존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증거-를 제공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하나의 죽어가고 있는 오류이다. 예수님은 이 오류를 신성의 과학으로 대처하셨으며 그것의 무존재성을 증명하셨다. 하나님이 그의 기름 부은 자에게 부여하셨던 놀라운 영광 때문에, 유혹과 죄와 질병과 사망은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 인간들이 그 육신을 죽였다고 생각하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그것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천 사이언스 안에서 참된 사람은 하나님, -즉 악이 아닌 선-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과 따라서 필멸의 존재가 아니고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실증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증거의 과학을 가르치셨다. 그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고 있는 자신의 말씀, 즉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라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시험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곳에 계셨다. 그들은 오류를 내어 쫓고 병자들을 고치며 죽은 자들을 일으킴으로써, 마치 그의 육신적 이별 후에 그들이 깨달았던 것처럼, 그의 생명-원리를 좀 더 완전히 깨달아야만 했다.
<43:3>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의 위대함과 그들이 보는 앞에서의 그의 물질적인 사라짐과 그의 다시 나타남, 이 모든 것들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직까지는 그들은 단지 믿기만 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의 도래가 성령의 강림에 의해, - 즉 사순절 날을 그렇듯 환하게 비추었던 신성의 과학의 쏟아져 내려옴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으며, 지금 그것의 고대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최후의 증명은 그의 제자들에게 가장 숭고하고, 가장 설득력이 있고, 가장 이익을 주는 것이었다. 무지막지한 박해자들의 악의와 그의 배신자의 배반과 자살은 신성의 사랑에 의해 극복되어 사람과 하나님의 참된 아이디어에 대한 영광을 드러냈는데, 이 아이디어를 예수님의 박해자들이 조롱했고 또 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셨고, 그것 때문에 그가 십자기 형을 받아야만 했던 진리의 최종적 실증이 세상을 위한 새 시대를 열었다. 그의 영향력을 멈추고자 그를 살해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영속적으로 만들고 확장시켰다.
예수님은 그가 마셨던 비탄의 잔으로 인해 실증의 단계에서 더 높이 오르셨다. 인간의 법이 그를 심판했지만, 그는 신성의 과학을 실증하고 있었다. 그의 적들의 잔학성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그는 물질과 필멸성을 무시하며 영적 법칙 아래에서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적 법이 그를 지탱해주었다. 신성(神性)의 것들이 모든 점에서 인성(人性)의 것들을 극복하여야만 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생활하셨던 과학이 생명과 본질과 이지에 대한 모든 물질적 믿음들과 그러한 믿음들로부터 기인한 수많은 오류들을 이겨내야만 한다.
<43:32>
사랑은 증오를 이겨야만 한다. 왕관을 위해 가시관이 치어질 수 있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축복이 뒤따르고, 그리고 영의 지고성이 실증될 수 있게 되기 전에, 진리와 생명이 오류와 사망에 대한 승리의 도장을 찍어야만 한다.
<44:5>
무덤의 고요한 구역이 예수님에게 그의 적들로부터의 피난처, 즉 그곳에서 존재에 관한 위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장소를 제공했다. 그의 무덤 안에서의 사흘에 걸친 일이 시간에 영원의 봉인을 하였다. 그는 생명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과 사랑이 증오의 지배자라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는 의약과 수술과 위생의 모든 주장들을 크리스천 사이언스, 즉 물질을 지배하는 마음의 권능이라는 기반 위에서 대처했고 극복했다.
그는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약을 사용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소진된 에너지를 회복시키기 위해 음식이나 신선한 공기에 의존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수건과 몸을 감은 천을 풀려고 그 손들을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발을 예전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찢어진 손바닥을 아물게 하고, 옆구리의 상처와 찢어진 발을 싸매기 위한 외과의사의 기술을 요하지도 않으셨다.
자연의 하나님이, 사람의 참되게 얻어내진 권능에 대한 예수님의 증명 안에서 그를 지탱해주는 것이 초자연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물질적 기술을 초월한 수술의 방법이었지만, 그것은 초자연적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신성적인 자연스러운 행위이었는바, 그것에 의해 신성이 그리스도적 치유에 대한 깨달음을 인류에게 가져왔고, 인간의 발명보다 무한히 높은 방법을 드러냈다.
<44:28>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덤 안에 숨겨져 있는 동안 그가 죽은 것으로 믿었지만, 그러나 그는 좁은 무덤 안에서 필멸적인, 즉 물질적인 감각을 파기하는 영의 권능을 실증하며 살아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바위들이 박힌 벽들이 있었고, 동굴의 입구로부터는 커다란 바위가 굴려내져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물질적 장애를 쳐부수었고, 모든 물질적 법을 극복했으며, 숭고한 성공의 영광, 즉 영원한 승리의 관을 쓰고 그의 어두운 휴식처로부터 걸어 나오셨다.
<45:6>
우리 주님은 사망과 무덤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통해 신성의 과학을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실증하셨다. 예수님의 행위는 인간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고 또 온 세상을 죄와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외견상]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고 쓰고 있다. 자신의 육신이 매장된 후 사흘 만에 그는 자기 사도들과 이야기하셨다. 박해자들은 불멸의 진리와 사랑을 무덤 안에 감추는데 실패하였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고투하는 심정들에게는 평화로다! 그리스도가 인간적 소망과 믿음의 문으로부터 바위를 굴려 내버렸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드러냄과 실증함을 통해, 영적 아이디어인 사람과 그의 신성의 원리, 즉 사랑과의 가능한 하나 됨까지 그들을 고양시키셨다.
부활 후 제일 먼저 예수님을 보고 그가 가르쳤던 모든 것의 최종적인 증거를 보았던 사람들은 그 사건을 잘 못 해석하였다. 그의 제자들까지도 처음에는 그를 영이나 귀신 또는 유령이라고 불렀다, 왜냐면 그들은 그의 육신이 죽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재현은 영의 귀환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십자가상의 처형 전에 가졌던 육신과 동일한 육신을 보여주었으며, 그럼으로써 물질을 지배하는 마음의 지고함을 찬양하셨다.
45:32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의 승리를 완전히 이해할 만큼 충분히 진전되지 못해서, 그들이 그의 십자가 처형 뒤에 그를 보고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많은 놀라운 역사(役事)들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가 가르쳤던 모든 것들의 진실성을 확신하도록 해주었다.
<46:5>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친구들 안에서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던 말씀에 의해, 그리고 빵을 떼심에 의해 그들에게 알아차림을 당하셨다. 수세기 전에 그렇듯이 예수님의 정체를 확인해주었던 신성의 영이 영감을 받은 말씀을 통해 말해오고 있으며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그것을 통해 말 할 것이다. 그것은 받아들이고자 하는 심정에 계시되고, 악을 내쫓고 병자를 치유함으로 다시 보여 지고 있다.
주님은 육체적 구조는 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고, 그의 부활 후에는 스스로가 승천하기 전까지는. -즉 다르게 말하여 영, 즉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 안에서 더욱 높이 고양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몸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육신적 감각들에게 증명하셨다. 이것을 도마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그로 하여금 못자국과 창으로 인한 상처를 조사해보도록 하셨다.
사망이라고 보여 졌던 것 이후의 예수님의 변화하지 않았던 육신 상태는 모든 물질적 상태들을 초월한 그의 고양(高揚)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고양됨이 그의 승천을 설명해주었고, 무덤 이후의 시련과 진보의 상태를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 주었다. 예수님이 “길”이셨다; 다시 말해 그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길을 표시하셨다. 승천이라고 하는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기록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 실증을 통해, 그는 자기 제자들의 물리적 지식을 초월하여 오르셨다, 그리고 물질적 감각들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46:30>
그리고 나서 그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다. 이 것은 그들이 목격하고 겪었든 모든 일들로 인하여 신성의 과학에 대한 보다 확장된 깨달음에 이르도록, 즉 더 나아가 그들에게 하나님이신 생명에 대한 희미한 개념을 주었던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실증들에 대한 영적 해석과 통찰에 이르도록 깨우쳐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을 물질적 감각으로 가늠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영광을 입은 스승에 대한 참된 관념을 획득한 후, 그들은 더 이상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 일의 신성의 원리만을 의지하는 더 나은 치유자들이 되었다. 빛의 쏟아져 내림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때로 사순절의 날에서처럼 압도적인 권능이었다.
<47:10>
유다는 예수님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몄다. 그 정의로운 사람을 향한 세상의 배은망덕과 증오가 그의 배반을 초래했다. 그 배반자가 받은 대가는 은 서른 냥과 바리새인들의 미소였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회의를 품었을 때, 자신의 때를 선택하였다.
유다와 그의 주님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드러내려고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주님의 위대한 선하심이 예수님과 그의 배반자 사이에 심연을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영적인 거리가 유다의 시기심에 불을 붙였다. 황금에 대한 탐심이 그의 배은망덕함을 강화하였고, 한동안은 양심의 가책을 잠잠하게 했다. 그는 세상이 일반적으로 진리보다는 거짓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대중의 평가에서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예수님에 대한 배신을 꾀하였다. 그의 음험한 계략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며, 배반자도 그것과 같이 추락하고 말았다.
그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고투에서 제자들의 자기들 주님을 버리고 달아남은 벌을 받았다; 그들 각각은, 우리에게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는 성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난폭한 죽음을 맞았다.
<47:31>
동산에서의 암흑과 영광의 밤 동안에, 예수님은 그 어떤 가능 함직한 물질적 이지에 대한 믿음의 순전한 오류를 깨달으셨다. 소홀히 여김을 당함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고통과 편협한 무지라는 몽둥이가 그를 심하게 쳤다. 그의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너희는 나와 한 시간이라도 깨어있지 못하느냐?”고 하셨다. 그들은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고통 안에서 기다리고 몸부림하며, 세상을 위해 불평 없는 경계를 서는 그분과 함께 지킬 수 없었을까? 그러한 인간적 갈망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은 영원히 땅으로부터 하늘을 향하여, 즉 감각으로부터 혼을 향하여 돌아서셨다.
<48:10>
겟세마네의 풀밭에 성스러운 축복 안에서 떨어졌던 고통의 땀방울을 기억한다면, 아주 약한 제자나 매우 강한 제자라도, 그와 같은 잔으로부터 마시게 될 때, 불평을 말하고, 죄의 파괴자에 대한 죄의 복수로부터 오는 고양시키는 시련으로부터 빠져나갈 생각을 한다던지, 심지어는 그러기를 원하기까지 할까? 생애의 과업을 완수하기까지는 진리와 사랑은 거의 영예를 안겨주지 않는다.
유다는 세상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세상의 방어 수단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진리와 사랑에 대한 위대한 실증자는 시기와 증오 앞에서 침묵하셨다. 베드로는 자신의 주님의 적들을 쳐부수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금하셨고, 그럼으로써, 적의(敵意)나 동물적 용기를 꾸짖으셨다. 그는 “네 칼을 칼집에 꽂아라.”고 하셨다.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자기 자신의 중대한 질문 앞에서 창백한 채로, 빌라도는 예수님의 적들의 요구에 본의 아니게 동의하도록 끌려들어 갔다. 빌라도는 인간의 권리와 신성의 사랑을 거스르는 자신의 엄청난 결정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무지하였고, 생명이 무엇이며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최종적 실증을 자신이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49:1>
십자가 주변의 여인들은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자신들의 헌신을 촉발했고, 자신들의 신앙에 날개를 달아주었으며, 자신들의 깨달음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었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고,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주님에게, “주의 이름을 대면 마귀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하더이다.”라고 말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내보냈던 일흔 명은 어디 있었는가? 열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음모자들이었단 말인가?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해설자를 잊어버렸더란 말인가? 그들은 그의 막강한 일들과 그의 수고와 고난과 희생과 그의 신성한 인내와 숭고한 용기와 보상받지 못한 애정을 그리도 빨리 시야에서 놓쳐버렸던가? 오, 그들은 왜 충성심을 나타내는 단 한 조각의 징표로라도 그의 마지막 인간적 갈망을 채워주지 않았던가?
선의 겸손한 실증자, 즉 사람의 가장 높은 차원의 교사이며 친구인 그는 자신의 지상에서의 운명을 하나님과 함께 홀로 대면했다. 불쌍히 여길 어떤 인간의 눈도 그곳에 없었으며, 구해 줄 어떤 팔도 없었다. 그가 축복했던 모두들로부터 버림받은, 하늘로부터의 최대의 신뢰를 위탁받은, 권능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이 하나님의 신실한 파수꾼은, 무한한 영의 새롭게 해줌에 의해 변형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물질적 조건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 분노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으며 진리와 생명과 사랑을 통하여 죄와 질병과 사망과 무덤에 대해 승리할 수 있음을 증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49:26>
그들 앞에서 그가 겸손하게 걸었던, 제사장들과 랍비들, 그리고 신성의 권능에 대해 그가 최상의 증거를 보여주었던 사람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조소적으로 말하면서 십자가상의 그를 조롱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면전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이 비웃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는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또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이 말 없듯이, 그가 자기 입을 열지 아니 하였다.” “누가 그의 세대를 선포하리요?” 누가 진리와 사랑이 무엇인지 결정할 것인가?
<50:5>
자신의 일의 중대성에 대한 압도적인 느낌에 더해진, 조롱과 버림 받음과 고문의 최종적 극치의 순간이,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끔찍한 울부짖음을 짜냈다. 이런 절망적인 호소가 만일 인간 부모에게 행해졌다면, 그것은 그렇듯이 충실한 아들을 지탱해주고 축복해줄 수 있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유보할 수 있는 그 아버지의 정의와 사랑을 비난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호소는 그의 신성의 원리, 즉 사랑이신 하나님, 그리고 사랑의 순수한 아이디어인 자기 자신, 양자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생명, 진리, 그리고 사랑이 그의 최고의 실증을 하고 있던 그를 버렸던가? 이것은 놀랄만한 물음이었다. 아니다! 그들은 그의 안에, 그리고 그는 그들 안에 거했었음에 틀림없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인류를 위한 막강한 축복을 빼앗겨버리고 말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의 완전한 인식이 육신적 감각들의 증거 앞에서 한 순간이라도 꺾였었더라면,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었겠는가? 그들이 실제로 했던 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들이 그릇된 것이었고, 그것들의 정확성에 대한 모든 증거가 그의 죽음으로 인해 파괴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말이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는 못했다.
<50:26>
그 시간의 무거운 짐은 인간적 개념을 초월한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사명의 목적에 대해 믿지 않는 필멸의 마음들의 불신이 그의 살을 꿰뚫는 가시들보다 백만 배나 날카로운 것이었다. 예수님이 메고서 비통의 언덕을 올랐던 진짜 십자가는 진리와 사랑에 대한 세상의 증오이었다. 그의 충성스러운 입으로부터 “엘리, 엘리, 라마사박타니?”라는 하소연하는 부르짖음을 짜낸 것은 창도 아니었고 물질적 십자가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움직이도록 했던 인간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에 대한 상실의 가능성, -즉 그의 생애가 가진 숭고한 영향력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이었다. 이 우려가 그의 잔에 쓸개즙 방울을 보태 넣었다.
<51:6>
예수님은 그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는 신성의 형상 안에 있는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위해 생명에 대한 인간적 관념을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멸의 생명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줄 목적으로 인간들로 하여금 필멸적인 육신의 파괴를 시도하도록 허용하였다. 그 어느 것도 사람의 이 생명을 죽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임시적 생명을 자신의 적들의 손에 넘겨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지상에서의 임무가 끝났을 때, 파괴될 수 없고 영원한 그의 영적 생명은 영원히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물질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과 실재하는 생명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소멸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자신의 영적 생명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다.
그의 완전한 본보기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행하셨고 또 다른 이들에게 행하도록 가르치셨던 일들을 수행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치유에 있어서의 그의 목적은 건강을 회복 시켜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의 원리를 실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말하고 행했던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즉 진리와 사랑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었다. 그를 박해했던 사람들의 동기들은 육신적 예수님에게 가한 교만과 질투와 잔학과 복수였지만, 실은 그들의 관능성을 꾸짖는 신성의 원리, 즉 사랑을 겨냥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기적이 아니었다. 그의 영성이 그를 관능주의로부터 분리시켰으며, 이기적 물질주의자들이 그를 미워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하여금 병든 이를 고치고, 악을 내어 쫓고, 죽은 이를 살릴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이 영성이었다.
<52:1>
그는 어린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의 일”에 열심이었다. 그의 추구하던 바는 그들의 추구하던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의 주인은 영이었다; 그들의 주인은 물질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은 부(富)를 섬겼다. 그의 애정은 순수했다; 그들의 애정은 육신적인 것이었다. 그의 감각들은 건강과 거룩함과 생명에 대한 영적 증거를 흡수했다; 그들의 감각은 정반대로 증언하였고, 죄와 질병과 사망에 대한 물질적 증거를 흡수하였다.
그들의 불완전함과 불순함은 그의 완전함과 순수함으로부터 오는 상존하는 꾸짖음을 느꼈다. 그럼으로 인해 그 올바르고 완전한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증오가 있었던 것이며, 오류가 그에게 보일 반응에 대한 예언자의 선견이 있었던 것이다.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다”는 것이 오게 되어있는 평화의 왕자에 관한 이사야의 생생한 묘사였다. 헤롯과 빌라도는 이 지구상에서 거닐었던 최상의 사람을 수치와 죽음으로 몰아넣을 목적으로 뭉치기 위해 오래된 반목을 젖혀놓았다. 오늘 날에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류와 악이 다시금 진리의 옹호자에 대적하여 공동 전선을 펴고 있다.
“슬픔의 사람”은 물질적 생명과 이지의 무존재성 그리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선이신 하나님의 막강한 현실성을 가장 잘 이해하셨다. 이것들이 마음-치유 즉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들이며 이것들이 그를 사랑으로 무장시켰다. 하나님의 지상에서의 최고의 대변자가 신성의 권능을 반영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것으로 말씀하면서, 예언하기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저도 할 것이요”라고 하셨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셨다,
<52:29>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그들의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자가당착적이었다. 고집불통이었고 방탕했으며 위선자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탐식가이며 술주정꾼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는 베엘제불을 힘 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였고,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였다. 후자의 비난은 맞는 말이었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것과는 달랐다. 예수님은 금욕주의자는 아니셨다. 그는 침례자의 제자들이 하는 것과 같은 금식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자렛 사람과 같이 식욕과 정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은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다. 그는 죄인들을 날카롭고 단호하게 꾸짖으셨는데, 이는 그가 그들의 친구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잔을 마셔야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53:8>
예수님의 평판은 그 자신의 성격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었다. 왜인가? 그것은 신성의 원리와 예수님이 행위가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성의 과학 안에서 일을 했다. 그의 말씀과 일들은 세상 종교적 관념을 초월했고 그것과 상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에게는 미지(未知)의 것이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신성의 무한한 사랑으로 보다는 인간적인 막강함을 가진 존재로 믿었다.
세상은 예수님이 촉발했던 불편함과 그런 불편함으로부터 올 수 있는 축복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다. 과학은 진리로 인해 매우 자주 발생하는 그 충격의 원인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충격은 개인과 진리 사이에 있는 매우 먼 거리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를 부인하거나 선이 악의 파괴를 위해 하는 일생의 희생을 비웃거나 하는 대신 경고를 듣고 슬피 울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그의 육신 안에 우리의 죄들을 졌다. 그는 물질적 육신을 구성하는 필멸의 오류들을 알았고, 이런 오류들을 파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결함을 느꼈었을 때 그는 육신에 관한 모든 믿음들이나 물질적 생명에 대한 그의 감각을 정복하지도 못했었고 영적 권능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실증까지 이르지도 못했었다.
<53:32>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이 가졌던 죄에 가득 찬 믿음들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그런 믿음들에 대해 덜 민감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인간 생애의 위대함을 통해 신성의 생명을 실증하셨다. 그는 그의 순수한 애정의 광대함으로 사랑을 정의하셨다. 진리의 풍요함으로 그는 오류를 정복하셨다. 세상은 그의 옳음을 보지 못하여, 그것을 인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땅은 그의 영광스러운 본보기가 처음으로 경험시킨 조화를 받아 들였다.
<54:8>
누가 그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모든 사람들은 조만간에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참 아이디어에 자신들을 심어야만 한다. 그가 비싼 값을 치르고 산 보물을 텅 비어 있거나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들의 창고에 풍족하게 부어 채워주고자 하셨던 것이, 예수님의 혹독한 인간적 희생의 영감을 준 것이었다. 자신의 신성의 임무에 대한 증언으로, 그는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 병자와 죄인을 고치고, 물질이 아닌 마음을 통하여 사망에 대해 승리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셨다. 이것이 그가 신성의 사랑에 관해 내 놓을 수 있었던 최상의 증거였다. 그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의 말씀들도 그의 역사들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생명에 대한 그의 겸손한 해석을 받아들이고자 하지도 그의 본보기를 따르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의 세상에서의 쓰디쓴 잔은 찌꺼기까지 들이켜졌다. 겨우 몇 안 되는 겸손한 친구들만 그에게 충실히 남아 있었는데, 그들의 종교는 이름만인 종교 이상의 다른 무엇이었다. 그것은 너무 생기가 넘쳐, 그들로 하여금 그 나사렛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영생의 영광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잔을 마셔야만 할 것이라고 했으며, 역사가 그 예언을 확인하였다.
<54:29>
하나님 같고 영광을 받은 그 분이 오늘 날 지구상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신다면, 지금 그를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사람 가운데 얼마는 그를 배척하지 않을까? 만약 그가 존재와 종교에 대해 그들의 것들과는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면 그의 인간적 권리마저 부인하려 들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둔한 감각으로 인해, 오늘 날 전진하고 있는 세기가 예수님이 하라고 명령한 그리스도적 치유의 아이디어에 대해 비그리스도교적 비평과 취급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불패(不敗)의 사실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55:6>
어쩌면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가 예수님에게 자행했던 부당한 취급은 후세의 세기가 치유하는 그리스도와 존재의 영적 아이디어에 자행한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치유의 복음이 다시금 노변에서 설교되고 있고, 설교단에서는 때때로 그것을 경멸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단순한 말들이 어떻게 표현해보려고 하는 것보다 더 명백한 빛 안에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치유의 사명이, 비록 그것이 다시 회당으로부터 배척받고 있다 해도, 그리스도교로부터 제외된 채로 남겨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진리의 불멸의 아이디어가 그 날개 아래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끌어 모으며 온 역사를 통해 휩쓸며 내려오고 있다. 나의 기진한 희망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과학을 인정하고 그의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때 즉, 신성의 사랑이 인류를 위해 해왔고 또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성의 사랑의 치유력을 실감하게 되는 그러한 행복한 때를 그려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약속들은 이루어질 것이다. 신성의 치유가 재현되는 때는 모든 시대를 통해 존재한다;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가진 지상의 모든 것을 신성의 과학의 제단 위에 올려놓는 사람은 지금 그리스도의 잔을 마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적 치유의 정신과 권능을 부여받는다.
성 요한의 말씀에서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한다. 내가 깨닫기로는 이 보혜사가 바로 신성의 과학이다.

제 1 장 기도

제 1 장
기도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옮겨져 바다에 빠지라.’고 말하고, 그의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며 그가 말한 것들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면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것이 되리라.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심이라.
-그리스도 예수

<1:1>
죄인을 개심시키고 병자를 치유하는 기도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절대적 믿음, - 즉 그분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 자아를 버린 사랑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무어라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간에 나는 경험으로부터 말한다. 자기희생과 결합된, 기도와 경계함과 수행함이, 무엇이 되었든 인류의 그리스도교도화와 건강을 위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법들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들이 신성의 마음에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갈망이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의 갈망들이 말과 행동으로 형태를 갖추기 전에 틀이 잡히고 고양될 수 있도록, 그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해서 어떤 손실도 생길 수 없다.
<2:1>
기도를 위한 동기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 좋게 되도록 기도하는가 아니면 우리 기도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하여 하는가, 무한한 존재를 가르치고자 하는가 아니면 사람들로 하여금 듣도록 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기도함으로 이로움을 얻는가? 그렇다, 의로움에 대한 열망을 좇아 나오는 갈망은 우리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칭송의 속살거림으로 그분이 이미 하신 것 이상을 하도록 하나님이 움직여지지도 않고, 그 무한하신 존재는 모든 선을 베푸시는 것 이하로 할 수도 없다, 왜냐면 그 분은 변함없는 지혜이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열렬한 간구로써 우리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는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을 근거로 그것들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왜냐면 그분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기도가 존재의 과학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 선함이 진리의 실증을 달성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리라고 희망함이 요구되는 전부가 아니다. 마치 인간에게 간구 하는 것처럼, 신성의 마음에 간구하는 단순한 습관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인간적으로 제한된 것으로서 영속시킨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오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그분에게 더 이상이시기를 요청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지이시다. 우리는 무한한 마음에게 그분이 이미 알고 계신 것이 아닌 그 무엇을 알려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완전함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하는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상으로 쏟아내는, 누구나 갈 수 있는 샘에 가서 더 주기를 간구할 것인가?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갈망이 우리를 모든 존재와 축복의 근원에 다 가까이 데려간다.
<2:31>
하나님께 하나님이시기를 청하는 것은 헛된 반복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영원히 같으시다,” 그리고 변함없이 옳으신 그분은 그분 자신의 직분에 대한 일깨워드림 없이도 옳게 행하실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충고할 수 있다고 자신을 보증해줄 만큼 충분하지 않다.
<3:4>
누가 칠판 앞에 서서 수학의 원리에게 문제를 풀라고 기도하겠는가? 규칙은 이미 확립되어 있다, 그리고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가 모든 선함의 신성의 원리에게 그분 스스로의 일을 하라고 요청할 것인가? 그분의 일은 끝났다, 그리고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법칙을 적용해야만 하면 되는데, 그 축복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해준다.
신성의 존재는 사람에 의해 반영되어야만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인내하고, 자애로우며, 참된 “그 전체가 사랑스러운” 유일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깨닫는다는 것은 영원을 두고 해야 할 일이며, 생각과 에너지와 갈망을 절대적으로 바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무한하시다고 인정한다, 그리고는 이 무한한 마음에게 정보를 드리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 용서를 간청하고 한없는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간청한다. 우리는 이미 받은 좋은 것들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축복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함으로써 더 많이 받기에 적합하게 된다. 감사함이란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한 것이다. 행동이 말보다 더한 감사를 표현한다.
<3:27>
만일 우리가 생명과 진리와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모든 축복들에 대해 하나님께 고마움을 돌린다면, 우리는 불성실한 것이며 우리의 주님이 위선자들에게 하셨던 날카로운 꾸지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기도는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우리의 축복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심정이 신성의 진리와 사랑으로부터 멀리 있는 한, 우리는 황량한 삶들의 배은망덕함을 감출 수가 없다.
<4:3>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인내와 온유와 사랑과 선한 행실로서 표현되는, 은혜 안에서의 성장에 대한 열렬한 갈망의 기도이다. 우리 주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우리가 그에게 진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이며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우리들의 유일하게 가치 있는 감사의 증거이다. 외적인 경배 그 자체는 충성스럽고 정성스런 감사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면 그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항상 선하고자 하는 습관적 노력이 끊임없는 기도이다. 그것의 동기들은 그것들이 가져오는 축복들로 나타나는데, 이 축복들이 비록 들을 수 있는 말로써 인정함을 받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사랑과 함께 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입증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단순한 요청이 결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도록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날의 경계함을 통해 그리고 신성의 성품에 더욱 동화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나타나는, 더욱 선하고 거룩해지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가 그분의 모습으로 깨어날 때까지 우리를 새롭게 형성하고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는 신성의 품성을 실증함을 통해서 그리스도 신앙의 과학에 도달 한다; 그러나 이 사악한 세상에서는 선함이 “비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내를 통해 체험을 쌓도록 해야만 한다.
<4:27>
소리를 내어 하는 기도는 영적 깨달음의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는데, 영적 깨달음이 사람을 갱생시킨다; 그러나 무언(無言)의 기도와 경계와 독실한 복종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를 수 있도록 한다. 길게 하는 기도, 미신, 그리고 교리들이 사랑의 강한 날개를 잘라 버리고 종교에 인간적 형식을 옷 입힌다. 예배를 물질화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사람의 영적 성장을 저해하고 그로 하여금 오류에 대한 자신의 권능을 실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5:3>
잘 못한 것에 대해 비통해함은 개전(改悛)을 향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며, 바로 가장 쉬운 단계이다. 지혜가 요구하는 그 다음에 오는 큰 단계가 우리의 진실성에 대한 시험인 바, 다시 말하자면 개심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상황의 압박 아래 놓이게 된다.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잘 못을 되풀이하도록 요구하고,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한 대가로 고뇌가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가 정의의 법에는 한 푼의 에누리도 없다는 것과 우리는 “마지막 한 푼까지” 갚아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때까지, 여전히 그럴 것이다. 당신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당신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며,” 그것은 가득 찰 것이며 “흘러넘칠 것이다.”
성자들과 죄인들은 그들의 충분한 보상을 받지만, 항상 이 세상에서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분의 잔을 마셨다. 배은망덕함과 박해가 그 잔의 가장자리까지 채워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때에 맞게 힘을 주시며, 깨달음과 애정 안으로 그분의 사랑의 부요함을 부어주신다. 죄인들은 “마치 푸른 월계수”처럼 무성하지만, 시편의 기자가 더 멀리 바라보았을 때, 그는 그들의 종말, 즉 고통을 통한 죄악의 파괴를 볼 수 있었다.
기도가 죄를 무효화시키기 위한 고해(告解)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잘못은 참된 종교를 저해할 것이다. 죄는 그것이 그리스도, 즉 진리와 생명에 의해 파괴되어야만 용서된다. 만일 기도가, 죄가 무효화되었다는 믿음과 사람은 단지 기도함으로써 더 나아지게 된다는 믿음을 조장한다면, 기도는 하나의 악이다. 자신이 용서받았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죄 안에서 계속 머무르는 사람은 갈수록 더 나빠진다.
<5:29>
사도는 인자[그리스도]가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고” 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성의 본보기를 따르고, 오류와 질병을 포함하는 모든 악한 일들의 파괴를 추구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죄악으로 인한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면, “그도 우리를 부인하리라”고 말한다.
<6:3>
신성의 사랑이 사람을 올바르게 고치고 다스린다. 인간들은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신성의 원리만이 죄인을 개심 시킨다. 하나님은 그 분이 부여하시는 지혜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우리는 활용해야만 한다. 잘못 되었거나 끝내지지 않은 우리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는 것은, 우리는 용서를 비는 일 외에는 아무런 할 일도 없고, 그런 연후에는 잘못을 자유롭게 반복할 수 있다는 헛된 가정을 의미한다.
죄악의 결과로서 고통을 받도록 하는 것이 죄악을 파괴하는 방법이다. 죄악 안에서의 모든 가상적 쾌락은, 물질적 생명과 죄악에 대한 믿음이 파괴될 때까지, 그것에 상응하는 것 이상의 고통을 줄 것이다. 천국, 즉 존재의 조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존재에 관한 신성의 원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보다 더 우리는 구할 수도 없으며, 더 높이 바랄 수도 없으며, 더 멀리 갈 수도 없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비를 구했는지, 아니 했는지에 따라 죄악을 용서하시거나 처벌하신다고 가정하는 것은 사랑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며 기도를 잘못된 행동에 대한 안전밸브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악을 내쫓기 전에 그것을 드러나도록 하고 꾸짖으셨다. 어느 병들었던 여자에 대해 그는 사탄이 그녀를 매어 놓고 있었다고 하셨으며, 베드로에게는 “너는 나에게 걸림이 되는도다”라고 하셨다. 그는 오셔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죄악과 질병과 사망을 파괴하는지를 가르치고 보이셨다.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해 말씀하기를 “[그것은] 찍혀 넘어 뜨려진다”고 하셨다.
예수님 시절에 살았던 어떤 행정관이 “그의 꾸짖음은 매우 무서운 것이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우리 주님의 강한 어투가 이런 묘사를 확인해준다.
<7:1>
그가 오류에 대해 내렸던 유일하게 점잖은 판정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질책이 날카롭고 신랄했다는 더욱 뚜렷한 증거는, 그가 마귀들을 내어 쫓고 병든 사람들과 죄인들을 치유할 때 사용했던, 그런 강렬한 말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그 분 자신의 말들에서 발견된다. 오류를 포기함이 물질적 감각으로부터 그것의 그릇된 주장들을 박탈한다.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기도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생각에게 순간적인 엄숙함과 고상함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오래 지속되는 혜택을 주는가? 이런 것들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지식을 좇지 않는 열심”이 영적 성장과 온건한 결심과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온전한 지각(知覺)에 이롭지 않은 반작용이 발생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말로 하는 기도에 대한 동기는 그리스도교도적인 정서를 유도해내거나 북돋기에는 갈채에 대한 사랑을 너무 많이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혼이 아닌 육신적 감각이 물질적 황홀경과 감정을 만들어 낸다. 만약 언제나 영적 감각이 인간들을 인도한다면, 무아지경의 순간들로부터 더욱 헌신적인 자기 부정과 순수성을 가진 보다 고차원적 경험과 더 좋은 생활이 자라나올 것이다. 열렬한 감정의 자기만족적인 분출은 결코 그리스도교인을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귀”는 청각신경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아는 마음으로서, 그에게 사람의 모든 필요가 항상 알려져 있고 그에 의해서 그것이 채워질 것이다.
기도로부터 오는 위험은 그것이 우리를 유혹으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우리는 진짜가 아닌 갈망을 말하고, 죄에 빠져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위해 이미 기도한 적이 있다거나 언젠가 나중에 용서를 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회상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의도하지 않은 위선자가 될 수도 있다. 위선은 종교에 치명적이다.
<8:1>
말이 많은 기도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차분한 느낌을 줄지 모르지만, 그것은 죄인을 위선자로 만든다. 우리는 정직한 심정에 대해서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사악함을 단지 단속적(斷續的)으로 대면하고,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숨기려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희망이 없다. 그들의 기도들은 그들의 성격과는 일치하지 않는 지표(指標)들이다. 그들은 죄악과 비밀스런 교우관계를 가지는데, 그런 것의 외관으로 보이는 것을 예수님은 “모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외관상 열심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가 불순하고 따라서 성실하지 않다면, 그에 관한 비판은 무엇이어야만 하겠는가? 만일 그가 자신이 하는 기도의 숭고함에 이른다면 비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말들이 표현하는 큰 뜻과 겸손함과 감사함과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아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자 노력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왜냐면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공언(公言)함과 고백과 들을 수 있는 기도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선과 같다, -그것들은 “허다한 죄들을 덮는다.” 제 아무리 열렬한 표현으로 겸손해지기 위한 기도를 한다 해도 항상 그것을 갈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돌아선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그 분이 주는 보상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매우 사악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그것이 우리 앞에 그대로 드러나기를 청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런 심정에 대해 우리의 이웃들로 하여금 기꺼이 보도록 하는 것 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8:2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왜냐면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가 정직하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친구가 우리에게 어떤 잘 못에 대해 알려 준다면, 우리는 그 꾸지람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하며 말해진 것을 인정하는가? 우리는 그보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지는 않는가? 여러 해 동안 저자는 가치가 있는 질책에 대해 매우 감사해왔다. 잘못은 가치가 없는 비난에 있다, -즉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거짓됨 안에 있다.
<9:5>
모든 기도에 대한 시험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 안에 있다: 우리가 이런 요청으로 인해 우리의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가? 우리의 기도와 일관되게 삶으로써 우리 요청의 성실성에 대한 증거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위한 기도를 했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옛날부터의 이기심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이기심이 친절함에 그 자리를 내 주었다면, 우리는 우리 이웃을 비이기적인 관점에서 대하게 될 것이며,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단순히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요청함만으로는 이런 위대한 임무에 응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희망과 믿음의 열매를 누릴 수 있게 될 수 있기 전에 들어 매야만 하는 십자가가 있다.
당신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당신의 하나님을 사랑 하는가?” 이 계명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즉 모든 단순한 물질적 감각과 애정과 예배의식을 포기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황금향이다. 그것은 생명의 과학을 수반하며, 영의 신성의 지배만을 인정하는데, 그 안에서는 혼이 우리의 주인이며, 물질적 감각과 인간적 의지는 있을 자리가 없다.
<9:25>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즉 진리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함으로써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자 하는가? 아니다! 당신은 정말로 이 지경에 이르기를 갈망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의 친애하는 주님의 발자국을 좇아가는데 관심도 없으면서, 왜 그것에 대해 긴 기도를 하며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를 구하는가? 만일 그의 본보기를 따르고자 하지 않는다면, 왜 당신은 그의 본성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를 입술로 기도를 하는 것인가? 일관성 있는 기도는 올바로 행하겠다는 갈망이다. 기도는 우리가 피를 흘리는 발걸음으로라도 우리가 빛을 받을 수 있는 한 그 빛 안에서 걷고 또 걷겠다고 갈망함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인내심을 가지고 모심으로써, 우리의 진짜 갈망이 하나님에 의해 보상받도록 남겨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10:5>
세상은 기도에 대한 영적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여야만 한다. 만일 예수님의 세상적인 슬픔의 잔으로부터 덕을 볼만큼 선하다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슬픔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탱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신성적인 면에서 그렇듯 자질이 갖추어지고 그분의 잔을 기꺼이 마시고자 하게 되기 전에는, 수백만 번의 헛된 반복이 기도 안으로 권능의 실증과 “그 따르는 표적”을 통해 성령의 기름을 절대로 부어 넣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세상과 육신과 악을 이기고, 그리하여 모든 오류를 파괴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추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분투함이 바로 우리를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영적으로 달성함이 신성의 생명에 대한 더 높은 깨달음으로 향한 문을 열어준다.
티베트에서의 예배 형태들 가운데 하나는 기도하는 기계를 들고 거리를 다니며 대문 앞에 멈춰서 그 기계를 돌려 기도를 만들어내고 돈 한 푼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전진을 위해 선발대로 온 병정이 기도의 특권을 위해 박해라는 대가를 치렀다.
<10:22>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기도에서 구하는 축복을 항상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모든 좋은 것들과 축복받음의 근원과 방도에 대해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분명히 받아야만 할 것이다. 성경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너의 정욕에다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과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는 것이 항상 우리에게 최선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무한한 사랑이 요청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지혜에게 자비롭기를 그리고 죄악을 벌하지 않기를 구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잘 못 구하는 것이다.” 처벌이 없이는 죄악은 불어난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또한 용서의 조건을 명시하였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할 때, 그는 “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11:5>
판사는 때때로 형벌을 감면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범법자에게 윤리적 이득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잘해봐야 단지 범법자를 한 형태의 처벌로부터 구해줄 뿐이다. 무죄를 선고하거나 유죄를 선고할 권리가 있는 윤리의 법은 인간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 갈” 수 있게 되기 전에 배상할 것을 언제나 요구한다. 이 진전을 강제하기 위해서 범해진 법은 처벌을 가져온다.
단순한 법적인 용서 (그리고 다른 용서는 없는데, 그것은 신성의 원리는 우리의 죄악이나 실수가 고쳐질 때까지는 절대로 그것들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만일 그가 참으로 혐오감을 가지고 악으로부터 돌아설 만큼 이미 충분하게 고통을 받지 않았다면, 범법자로 하여금 범법행위를 반복하도록 풀어 놓아준다. 진리는 오류에 대해 조금도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없애 버린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으셨는데, 각 개인의 죄악에 내려진 신성의 언도를 무효화시키기 위함은 아니었다, 왜냐면 죄악은 필연적인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탄원은 인간들에게 단지 인간 자신들의 믿음의 결과들만을 가져온다. 우리는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거룩함을 획득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거룩함을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갈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함으로 가는 유일한 실용적인 길로 확실하게 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꺼이 이를 행하여야만 한다. 기도가 변경할 수 없는 진리를 변화시킬 수는 없으며, 기도만으로는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열렬한 습관적인 갈망을 동반한 기도가 우리를 모든 진리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런 갈망은 소리로 들을 수 있는 표현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과 생활을 통해서 가장 잘 표현된다.
<12:1>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 치유하는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병든 자를 치유해주시라는 단순한 요구는 항상 함께 하시는 신성의 임재를 그 이상으로 더 얻을 수 있는 힘이 없다. 병든 자를 위한 그러한 기도의 이로운 효과는, 하나님에 대한 맹신을 통해 그것이 육신에 더욱 강하게 작용하도록 하며,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믿음이 다른 한 믿음을 쫓아내는 것, 즉 미지의 것에 대한 믿음이 질병에 대한 믿음을 쫓아내는 것이다. 맹목적 믿음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은 과학도 진리도 아니며,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바와 같은 신성의 치유 원리에 대한 인간적인 깨달음도 아닌데, 예수님의 겸손한 기도들은 진리, 즉 사람의 하나님의 모습임 그리고 사람의 진리와 사랑과 하나임으로부터 오는 심오하고 진지한 항변들이었다.
물질적인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병든 자에게 마치 하나의 의약과 같은 작용을 하는데, 그것은 그것 자체의 효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의 힘을 인간의 신앙과 믿음으로부터 빌려올 뿐이다. 의약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것에는 어떤 이지(理智)도 없기 때문이다. 의약으로 하여금 외관상 독성이 있든지 치유하는 힘이 있게 하는 것은 신성의 원리나 사랑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적인 믿음일 뿐이다.
병든 사람의 회복을 위한 기도의 보통의 관습은 맹목적인 믿음 안에서 도움을 찾는다, 그런데 도움은 깨우침을 가진 이해로부터 와야만 한다. 믿음 안에서의 변화는 끊임없이 계속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적 사고로부터 나오는 상품일 뿐 신성의 과학의 생성물이 아니다.
<12:27>
하나님이 어느 한 숭배자를 위해서는 개입하고, 같은 정도의 기도를 바치는 또 다른 사람은 돕지 않으실까? 병든 사람들이, 그들이 기도를 했기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기도를 해주었기 때문에 회복된다면, 오직 탄원하는 사람들 (당사자 또는 대리인)만이 나아야 한다. 신성의 과학 안에서는, 그곳에서는 기도들이 심적인 바, 모두가 하나님을 “어려움 안의 확실한 도움”으로서 자신들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사랑은 그것의 적응과 부여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고 보편적이다. 그것은 “목마른 자는 누구나 물가로 오라”고 외치는 열려있는 샘물이다.
<13:5>
공중(公衆) 앞에서 하는 기도에서 우리는 흔히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을 넘어서, 즉 열렬한 갈망에서 오는 정직한 관점을 넘어서 나아간다. 만일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해, 보이지 않게 열망하고 드러나도록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들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헛된 반복”이다. 만일 우리의 탄원들이 진지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드러나게 갚아주실 것이다. 단지 공중 앞에서 하는 우리 갈망들에 대한 표현이 그것들을 증가시킬 수 있는가? 생각보다 말에 의해 전능하신 귀를 더 빨리 얻는가? 만일 기도가 진지하다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또는 우리네 동료 인간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만일 우리가 그 소망을 정직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마음속에 품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진짜 소원들을 쏟아내는 말들로 압도해버리는 위험을 덜 초래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하나의 육신적 인격으로서의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믿음에 따르는 인간적 의심과 두려움을 버리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래서 우리는 무한한 비육신적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이로운 일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데, 이 사랑에게는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신성의 원리, 즉 사랑에 대한 인간의 무지로 인하여, 만유의 아버지는 육신적 창조자로 표현 된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자신들을 단지 육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반영으로서의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의 영원한 비육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무지하다. 오류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 즉 사람의 존재의 실재성에 대해 무지하다, 왜냐면 감각의 세계는 육신 안이 아닌, 혼 안의 생명을 인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14:1>
만일 우리가 지각할 수 있을 만큼 육신과 함께 있고, 우리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대상인 그 전능자를 육신을 가진 물질적 존재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영을 실증함에 있어서 “육신으로부터 떨어져 주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과 같이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황홀경이나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통해 밝혀진 대로의 생명에 대한 실제적 실증과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에 복종함, 즉 신성의 사랑에 의해, -물질이 아닌 영에 의해 절대적으로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생명과 이지가 순전히 영적이라는 것, -즉 물질 안에 있지도 또 물질로부터 연유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라, -그러면, 육신은 어떠한 불평도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프다는 믿음으로 인한 고통이라면, 당신 자신이 갑작스레 낫게 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육신이 영적인 생명, 진리 그리고 사랑에 의해 다스려질 때, 슬픔은 기쁨으로 변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즉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자아가 육신에 있지 않고, 진리와 사랑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는 혼의 기도이지, 물질적 감각의 것이 아니다.
영적 깨달음과 사람의 온 세상에 대한 지배권에 대한 의식을 밝혀주는, 신성의 생명은 물질적인 삶에 대한 믿음과 꿈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 깨달음이 오류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할 수 있다.
<14:31>
“너는 기도할 때에 너의 골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고 은밀히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15:1>
이렇듯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골방은 영의 지성소를 상징하는데, 그 문은 죄 많은 감각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만 진리와 생명과 사랑은 받아들인다. 그 문이 오류에 대해서 닫혀져 있다면, 진리에 대해서는 열려있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은밀히 계신 아버지는 육신적 감각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며, 말에 의해서가 아니고, 동기에 의해 갚아주신다. 기도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잘못된 감각의 문은 닫혀져 있어야만 한다. 사람이 모든 오류를 파괴하는 영, 즉 신성의 원리인 사랑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입은 다물어져 있어야만 하고 물질주의는 침묵해야만 한다.
올바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야만 한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물질적 감각들을 침묵시켜야만 한다. 진지한 갈망의 조용한 지성소 안에서 우리는 죄악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전체이심을 주장해야만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지혜, 진리 그리고 사랑을 위해 수행하고 경계하는 정직한 심정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만” 한다. 그러한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열망들을 실행으로 옮기는 한 응답된다.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은밀히 기도하고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우리의 성실성을 입증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세상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은밀한 아름다움과 보상 안에서 기뻐한다. 자신을 망각함, 순수함, 그리고 애정이 끊임없는 기도들이다. 공언(公言)이 아닌 실천, 믿음이 아닌 깨달음이 전능자의 귀를 빌리고 바른 손의 도움을 받도록 하며, 그것들이 확실하게 무한한 축복을 불러 내린다. 믿음직함이 깨인 신앙의 기반이다. 거룩함에 적합함이 없이, 우리는 거룩함을 받을 수 없다.
<16:1>
물질적인 것들의 커다란 희생이 이 고도의 영적 깨달음에 앞서야만 한다. 가장 고차원의 기도는 단순히 믿음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실증이다. 그러한 기도가 병을 치유하고 죄와 사망을 파괴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무죄한 진리와 죄 많은 감각의 거짓됨 사이를 구별한다.
우리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의 짤막한 기도를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그분의 이름을 따라 주기도문이라고 한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고 인간의 모든 필요를 망라하는 그 기도문을 주셨다. 물론 마지막 문장이 후세의 필사생(筆寫生)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에 대해 성경학자들 사이에 의문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기도 자체의 의미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구절은 원전을 정확히 읽으면, “우리를 악한 존재로부터 구하소서”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 그 탄원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강화시켜준다, 왜냐면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악한 존재” 또는 유일한 악이란 처음 거짓말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물질적 관능과 죄악을 초월함에 따라서만,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열망과 영적 의식(意識)에 다다를 수 있는데,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병든 사람을 즉시로 고치는 것이다.
<16:24>
여기에서 주기도문의 영적 의미라고 내가 이해하는 바를 말해보고자 한다.

하늘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의 부모님이신 하나님, 전적으로 조화로우시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받들어 모셔야 할 단 한 분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은 이미 임하였으며, 아버지께서는 항상 현존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최고이심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주옵시고, 굶주린 애정을 채워주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
사랑은 사랑을 통해 반영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죄악과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모든 권능이시며, 모든 생명이시고 진리이시고 사랑이시며, 일체의 일체이십니다.

서문

서문
vii:1
오늘은 지탱해주는 무한한 존재에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가득 찬 날이다. 깨어 있는 목자들이 완전히 밝아진 날의 환한 광채가 비추이기 전에 미미한 아침 햇살을 본다. 그 희미한 별은 그렇듯 예언자 목자들에게 비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의 밤을 건너 아침 햇살이 동터오고 존재를 인도하는 별이 빛날 때까지 밤을 가로질러서, 이해력이 몽매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보여줄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인간 사자(使者)인 베들레헴의 아기가 요람에 누워있는 궁벽한 곳에 이르렀다. 현자들은 영원한 조화에 이르는 길을 비추어주는 신성의 과학의 새벽 별을 바라보고 따르도록 인도되었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때가 왔다. 교리들 그리고 유서 깊은 제도들과는 관계가 없는 진리가 인류의 문을 두드린다. 과거에 안주함과 물질주의의 차가운 인습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이제 더 이상 신앙으로 가는 디딤돌이 아니다. 복종을 하기 위한 유일한 보증은, 그를 올바로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인, 그분께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다. 제국들은 멸망할지라도, “주님은 영원히 통치하신다.”
한 권의 책이 새로운 사상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것들을 빠르게 이해시킬 수는 없다. 키 큰 참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고, 거친 화강암을 쪼아 내는 일은 불굴의 개척자가 해야 할 일이다. 미래의 세대들은 개척자가 성취한 일을 선포해야만 한다.
vii:27
저자가 질병뿐 아니라 죄악의 치료를 통해 진리의 힘을 발견한 이래, 그녀의 시스템은 충분히 시험을 받았으며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고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사람은 그것의 신성의 원리에 복종함에서 살아야만 한다. 이 과학의 힘을 완전히 펼쳐내기 위해서는, 음악의 과학이 틀린 음조를 정정하고 소리에 달콤한 조화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신적 감각의 부조화가 영적 감각의 조화에 굴복해야만 한다.
viii:9
신학과 물리학은 영과 물질 양자가 모두 실재하고 선하다고 가르치지만, 사실은 영이 선하고 실재하며 물질은 영의 반대이다.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실증으로 대답된다, - 즉 질환과 죄악을 치유함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 실증이 그리스도적 치유가 최상의 건강을 주고 최선의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바탕 위에서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공정한 싸움을 싸울 것이다. 물질적 치유 수단들을 사용하는 의사들이 오랜 동안 질병과 싸워 왔다; 그러나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의사들로 인해 질병이 줄었는가? 다음 두 개의 동시 발생적인 사실, 즉 대홍수 이전 사람들이 누렸다는 장수, 그리고 대홍수 이후의 질병의 급속한 증가와 악화된 맹렬함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저자의 저서인 “회고와 성찰”에서 1866년에 저자가 크리스천 사이언스라고 명명한 체계의 발견으로 저자를 이끈 경험을 설명하는 자전적 묘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1862년에 벌써 저자는 자신의 성서에 대한 연구의 결과를 기록하고 지인(知人)들에게 주기 시작하였다, 왜냐면 성경이 그녀의 유일한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이었다, -새로 발견한 영의 세계 안으로 내 딛는 어린아이의 첫 걸음이었다.

ix:1
그녀는 또한 주요 주제에 대한 그녀의 생각들을 간결하게 기록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진리에 대한 유아의 혀 짧은 소리에 불과했다. 어린이는 눈을 통해 바깥세상을 들이마시고, 그 마심을 즐거워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존재에 대해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그 세상을 묘사할 수는 없다. 그는 몇 마디의 말을 발견해내고, 그것들을 가지고 더듬거리며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고자 시도해본다. 나중에, 아직도 불완전하지만 더 확실해진 생각을 말로 표현하게 된다.
저자도 그러했다. 어떤 시인이 스스로에 대해 말했듯, 그녀는 “숫자가 떠오르는 대로, 숫자를 더듬거렸다.” 그 초기에 쓰였던 어떤 수필들이 아직도 그녀의 처음 학생들 사이에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원리와 그리스도적 치유의 실천을 서술하고자 하는 연약한 시도였고, 진리에 대해 완전하거나 만족스러운 설명은 아니었다. 오늘 날, 얼마간의 진보를 즐거워하면서도, 그녀는 아직도 그녀 자신이 천국 문의 곁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다리며 배우고자 하는 제자임을 발견한다.
그녀의 크리스천 사이언스에 관한 첫 번째 팸플릿은 1870년에 판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 주제에 관한 저술이 유익하게 연구되기 위해서는 이 과학이 치유에 의해 실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1876년이 될 때까지 인쇄물로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1867년부터 1875년이 될 때까지, 복사본들이 우호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다녔다.
ix:26
과학과 건강, 이 저서를 쓰기 전 그녀는 성서에 대한 해설을 위한 상세한 주석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한 번도 출판되지 않았다. 이것이 1867년과 1868년 사이의 일이었다. 이런 노력들이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생명-문제에 대해 그녀가 비교적 무지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에 대한 해답에 마침내 도달한 정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부모가 자식의 성장의 기억을 귀히 여기듯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그것들이 변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x:3
과학과 건강의 초판은 1875년에 발간되었다. 그 이래 정신적 치유에 관한 여러 가지의 저술이 출간되었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이론상 부정확했으며 과학과 건강으로부터의 표절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마음을 치유의 요인으로 간주했으나, 이 마음은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원리에서는 요소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 토대를 둔 몇 권의 저서들은 유용하다.
저자는 일반적 사조에 영합하기 위해 양심을 굽히지 않았으며, 진리에 관한 교과서를 거리낌 없고 정직하게 내어놓았다. 그녀는 그와 같이 무한한 주제를 미화하고 정교하게 묘사하며 완벽하게 상세히 다루어 보겠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수천의 잘 검증된 치유의 경우들에 의해, 그녀와 그녀의 학생들은 그녀의 가르침의 가치를 증명하였다. 이런 경우들 중 대부분은 정규 의료인들로부터 가망이 없다고 포기된 것들이었다. 모든 물리적 지원들이 실패할 때까지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환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질환을 치유하는 그분의 의향과 권능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치유에 관한 신성의 원리는 모든 진지한 진리 탐구자의 개인적 경험을 통하여 증명된다. 그것의 목적은 선하며, 그것의 실천은 어떤 다른 위생적인 방법들보다 실천 상 더 안전하고 더 막강하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리스도적 생각은 단시간 내에 진리에 의해 알아보아지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녀의 방법과 다투는 사람들은 그녀의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진리를 분별하면서도 자신들이 행한 일들이 질책 받을까보아 빛 안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지적인 숙달은 요구되지 않지만, 건전한 윤리의식이 가장 바람직하다.

xi:1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의 육신적 치유 현상은 인간 마음의 활동의 한 국면(局面)만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활동이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와 반하여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다른 모든 치료의 방법들은 물질에 대한 인간들의 믿음의 결과물들, -즉 영이 아닌 과학에 굴복하여야만 하는 육신적 마음의 작용의 결과물들이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육신적 치유는 예수님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신성의 원리가 작용하는 결과인 바, 그 앞에서 죄와 질병은 인간의 의식 안에서 자신들의 실재성을 잃고, 마치 어두움이 빛에게 그리고 죄가 회개에 자리를 내어 주듯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대단한 일들은 초자연적 것이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이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징표이다 - 즉, 인간의 의식 안에 항상 존재하며,
[감각의] 포로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짓밟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옛날에 약속된 바와 같이 지금 나타나, 스스로를 반복하는 신성의 영향력이다.
하나님이 이 세대에게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저자를 부르셨을 때, 그분의 포도원을 심고 물주라는 명령 또한 주어졌다.
xi:25
크리스천 사이언스 마음-치유에 대한 최초의 학교는 1867년 무렵 매사추세츠 주(州) 린에서 단 한 명의 학생만으로 저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학에 관련된 법이 통과됨으로써, 1881년 그녀는 주(州)의 인가 하에 보스턴에 매사추세츠 형이상학 대학을 개교하였는데, 이 법이 그녀로 하여금 이 학교를 의료 목적으로 설립인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1883년 이래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들에게 더 이상의 설립인가는 없었고, 그 당시까지 해서는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최초로 소개된 미합중국에 설립된 이런 성격의 대학으로서는 그녀의 대학이 유일한 것이었다.
xii:6
7년의 기간동안 4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이 대학에서 저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동시에 그녀는 최초로 설립된 Church of Christ, Scientist의 목사이었고, 매월 모이는 초대 Christian Scientist Association의 의장이었고, 자신의 저술들이 출판인이었으며, (이 기간 중 일부에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들에 의해 발간된 최초의 정기간행물인 Christian Science Journal의 유일한 편집자며 출판인이었다. 그녀는 그녀 생애의 다음에 오는 2년을 1891년에 발간한 과학과 건강의 개정판의 준비에 바쳐야 한다는 뿌리 깊은 확신으로 대학이 번성하던 정점에서 1889년 10월에 그녀의 대학을 닫았다. 그녀는 설립인가증을 유지하였으며 학장 자격으로서 그녀 교회의 부속기관으로 그 대학을 다시 열었다. 1907년 6월 10일이 되기까지 그녀는 그녀의 이상을 해명할 목적으로서는 한 번도 이 책을 전체에 걸쳐 통독(通讀)하지 않았다.
xii:23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 안에서, -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그리고 아픈 이들에게 치유를 전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으로서, - 저자는 진리의 정직한 탐구자들에게 이 책을 맡긴다.

메리 베이커 에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