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제 1 장 기도

제 1 장
기도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옮겨져 바다에 빠지라.’고 말하고, 그의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며 그가 말한 것들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면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바라는 것들은 무엇이나 받은 것으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것이 되리라.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심이라.
-그리스도 예수

<1:1>
죄인을 개심시키고 병자를 치유하는 기도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절대적 믿음, - 즉 그분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 자아를 버린 사랑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무어라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간에 나는 경험으로부터 말한다. 자기희생과 결합된, 기도와 경계함과 수행함이, 무엇이 되었든 인류의 그리스도교도화와 건강을 위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법들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들이 신성의 마음에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갈망이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의 갈망들이 말과 행동으로 형태를 갖추기 전에 틀이 잡히고 고양될 수 있도록, 그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해서 어떤 손실도 생길 수 없다.
<2:1>
기도를 위한 동기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 좋게 되도록 기도하는가 아니면 우리 기도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하여 하는가, 무한한 존재를 가르치고자 하는가 아니면 사람들로 하여금 듣도록 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기도함으로 이로움을 얻는가? 그렇다, 의로움에 대한 열망을 좇아 나오는 갈망은 우리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칭송의 속살거림으로 그분이 이미 하신 것 이상을 하도록 하나님이 움직여지지도 않고, 그 무한하신 존재는 모든 선을 베푸시는 것 이하로 할 수도 없다, 왜냐면 그 분은 변함없는 지혜이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열렬한 간구로써 우리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는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을 근거로 그것들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왜냐면 그분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기도가 존재의 과학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 선함이 진리의 실증을 달성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리라고 희망함이 요구되는 전부가 아니다. 마치 인간에게 간구 하는 것처럼, 신성의 마음에 간구하는 단순한 습관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인간적으로 제한된 것으로서 영속시킨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오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그분에게 더 이상이시기를 요청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지이시다. 우리는 무한한 마음에게 그분이 이미 알고 계신 것이 아닌 그 무엇을 알려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완전함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하는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이상으로 쏟아내는, 누구나 갈 수 있는 샘에 가서 더 주기를 간구할 것인가?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갈망이 우리를 모든 존재와 축복의 근원에 다 가까이 데려간다.
<2:31>
하나님께 하나님이시기를 청하는 것은 헛된 반복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영원히 같으시다,” 그리고 변함없이 옳으신 그분은 그분 자신의 직분에 대한 일깨워드림 없이도 옳게 행하실 것이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충고할 수 있다고 자신을 보증해줄 만큼 충분하지 않다.
<3:4>
누가 칠판 앞에 서서 수학의 원리에게 문제를 풀라고 기도하겠는가? 규칙은 이미 확립되어 있다, 그리고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가 모든 선함의 신성의 원리에게 그분 스스로의 일을 하라고 요청할 것인가? 그분의 일은 끝났다, 그리고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법칙을 적용해야만 하면 되는데, 그 축복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해준다.
신성의 존재는 사람에 의해 반영되어야만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인내하고, 자애로우며, 참된 “그 전체가 사랑스러운” 유일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깨닫는다는 것은 영원을 두고 해야 할 일이며, 생각과 에너지와 갈망을 절대적으로 바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무한하시다고 인정한다, 그리고는 이 무한한 마음에게 정보를 드리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 용서를 간청하고 한없는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간청한다. 우리는 이미 받은 좋은 것들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축복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함으로써 더 많이 받기에 적합하게 된다. 감사함이란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한 것이다. 행동이 말보다 더한 감사를 표현한다.
<3:27>
만일 우리가 생명과 진리와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모든 축복들에 대해 하나님께 고마움을 돌린다면, 우리는 불성실한 것이며 우리의 주님이 위선자들에게 하셨던 날카로운 꾸지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기도는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우리의 축복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심정이 신성의 진리와 사랑으로부터 멀리 있는 한, 우리는 황량한 삶들의 배은망덕함을 감출 수가 없다.
<4:3>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인내와 온유와 사랑과 선한 행실로서 표현되는, 은혜 안에서의 성장에 대한 열렬한 갈망의 기도이다. 우리 주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우리가 그에게 진 마땅히 갚아야 할 빚이며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우리들의 유일하게 가치 있는 감사의 증거이다. 외적인 경배 그 자체는 충성스럽고 정성스런 감사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면 그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항상 선하고자 하는 습관적 노력이 끊임없는 기도이다. 그것의 동기들은 그것들이 가져오는 축복들로 나타나는데, 이 축복들이 비록 들을 수 있는 말로써 인정함을 받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사랑과 함께 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입증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단순한 요청이 결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도록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날의 경계함을 통해 그리고 신성의 성품에 더욱 동화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나타나는, 더욱 선하고 거룩해지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가 그분의 모습으로 깨어날 때까지 우리를 새롭게 형성하고 만들어 갈 것이다. 우리는 신성의 품성을 실증함을 통해서 그리스도 신앙의 과학에 도달 한다; 그러나 이 사악한 세상에서는 선함이 “비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내를 통해 체험을 쌓도록 해야만 한다.
<4:27>
소리를 내어 하는 기도는 영적 깨달음의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는데, 영적 깨달음이 사람을 갱생시킨다; 그러나 무언(無言)의 기도와 경계와 독실한 복종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를 수 있도록 한다. 길게 하는 기도, 미신, 그리고 교리들이 사랑의 강한 날개를 잘라 버리고 종교에 인간적 형식을 옷 입힌다. 예배를 물질화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사람의 영적 성장을 저해하고 그로 하여금 오류에 대한 자신의 권능을 실증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5:3>
잘 못한 것에 대해 비통해함은 개전(改悛)을 향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며, 바로 가장 쉬운 단계이다. 지혜가 요구하는 그 다음에 오는 큰 단계가 우리의 진실성에 대한 시험인 바, 다시 말하자면 개심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상황의 압박 아래 놓이게 된다.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잘 못을 되풀이하도록 요구하고,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한 대가로 고뇌가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가 정의의 법에는 한 푼의 에누리도 없다는 것과 우리는 “마지막 한 푼까지” 갚아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될 때까지, 여전히 그럴 것이다. 당신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당신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며,” 그것은 가득 찰 것이며 “흘러넘칠 것이다.”
성자들과 죄인들은 그들의 충분한 보상을 받지만, 항상 이 세상에서는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분의 잔을 마셨다. 배은망덕함과 박해가 그 잔의 가장자리까지 채워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때에 맞게 힘을 주시며, 깨달음과 애정 안으로 그분의 사랑의 부요함을 부어주신다. 죄인들은 “마치 푸른 월계수”처럼 무성하지만, 시편의 기자가 더 멀리 바라보았을 때, 그는 그들의 종말, 즉 고통을 통한 죄악의 파괴를 볼 수 있었다.
기도가 죄를 무효화시키기 위한 고해(告解)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잘못은 참된 종교를 저해할 것이다. 죄는 그것이 그리스도, 즉 진리와 생명에 의해 파괴되어야만 용서된다. 만일 기도가, 죄가 무효화되었다는 믿음과 사람은 단지 기도함으로써 더 나아지게 된다는 믿음을 조장한다면, 기도는 하나의 악이다. 자신이 용서받았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죄 안에서 계속 머무르는 사람은 갈수록 더 나빠진다.
<5:29>
사도는 인자[그리스도]가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고” 왔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성의 본보기를 따르고, 오류와 질병을 포함하는 모든 악한 일들의 파괴를 추구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죄악으로 인한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면, “그도 우리를 부인하리라”고 말한다.
<6:3>
신성의 사랑이 사람을 올바르게 고치고 다스린다. 인간들은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신성의 원리만이 죄인을 개심 시킨다. 하나님은 그 분이 부여하시는 지혜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우리는 활용해야만 한다. 잘못 되었거나 끝내지지 않은 우리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는 것은, 우리는 용서를 비는 일 외에는 아무런 할 일도 없고, 그런 연후에는 잘못을 자유롭게 반복할 수 있다는 헛된 가정을 의미한다.
죄악의 결과로서 고통을 받도록 하는 것이 죄악을 파괴하는 방법이다. 죄악 안에서의 모든 가상적 쾌락은, 물질적 생명과 죄악에 대한 믿음이 파괴될 때까지, 그것에 상응하는 것 이상의 고통을 줄 것이다. 천국, 즉 존재의 조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존재에 관한 신성의 원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보다 더 우리는 구할 수도 없으며, 더 높이 바랄 수도 없으며, 더 멀리 갈 수도 없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비를 구했는지, 아니 했는지에 따라 죄악을 용서하시거나 처벌하신다고 가정하는 것은 사랑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며 기도를 잘못된 행동에 대한 안전밸브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악을 내쫓기 전에 그것을 드러나도록 하고 꾸짖으셨다. 어느 병들었던 여자에 대해 그는 사탄이 그녀를 매어 놓고 있었다고 하셨으며, 베드로에게는 “너는 나에게 걸림이 되는도다”라고 하셨다. 그는 오셔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죄악과 질병과 사망을 파괴하는지를 가르치고 보이셨다.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해 말씀하기를 “[그것은] 찍혀 넘어 뜨려진다”고 하셨다.
예수님 시절에 살았던 어떤 행정관이 “그의 꾸짖음은 매우 무서운 것이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우리 주님의 강한 어투가 이런 묘사를 확인해준다.
<7:1>
그가 오류에 대해 내렸던 유일하게 점잖은 판정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질책이 날카롭고 신랄했다는 더욱 뚜렷한 증거는, 그가 마귀들을 내어 쫓고 병든 사람들과 죄인들을 치유할 때 사용했던, 그런 강렬한 말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그 분 자신의 말들에서 발견된다. 오류를 포기함이 물질적 감각으로부터 그것의 그릇된 주장들을 박탈한다.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기도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생각에게 순간적인 엄숙함과 고상함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오래 지속되는 혜택을 주는가? 이런 것들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지식을 좇지 않는 열심”이 영적 성장과 온건한 결심과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온전한 지각(知覺)에 이롭지 않은 반작용이 발생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말로 하는 기도에 대한 동기는 그리스도교도적인 정서를 유도해내거나 북돋기에는 갈채에 대한 사랑을 너무 많이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혼이 아닌 육신적 감각이 물질적 황홀경과 감정을 만들어 낸다. 만약 언제나 영적 감각이 인간들을 인도한다면, 무아지경의 순간들로부터 더욱 헌신적인 자기 부정과 순수성을 가진 보다 고차원적 경험과 더 좋은 생활이 자라나올 것이다. 열렬한 감정의 자기만족적인 분출은 결코 그리스도교인을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귀”는 청각신경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아는 마음으로서, 그에게 사람의 모든 필요가 항상 알려져 있고 그에 의해서 그것이 채워질 것이다.
기도로부터 오는 위험은 그것이 우리를 유혹으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우리는 진짜가 아닌 갈망을 말하고, 죄에 빠져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위해 이미 기도한 적이 있다거나 언젠가 나중에 용서를 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회상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의도하지 않은 위선자가 될 수도 있다. 위선은 종교에 치명적이다.
<8:1>
말이 많은 기도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차분한 느낌을 줄지 모르지만, 그것은 죄인을 위선자로 만든다. 우리는 정직한 심정에 대해서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사악함을 단지 단속적(斷續的)으로 대면하고,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숨기려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희망이 없다. 그들의 기도들은 그들의 성격과는 일치하지 않는 지표(指標)들이다. 그들은 죄악과 비밀스런 교우관계를 가지는데, 그런 것의 외관으로 보이는 것을 예수님은 “모든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외관상 열심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가 불순하고 따라서 성실하지 않다면, 그에 관한 비판은 무엇이어야만 하겠는가? 만일 그가 자신이 하는 기도의 숭고함에 이른다면 비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말들이 표현하는 큰 뜻과 겸손함과 감사함과 사랑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아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자 노력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왜냐면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공언(公言)함과 고백과 들을 수 있는 기도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선과 같다, -그것들은 “허다한 죄들을 덮는다.” 제 아무리 열렬한 표현으로 겸손해지기 위한 기도를 한다 해도 항상 그것을 갈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돌아선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그 분이 주는 보상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매우 사악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그것이 우리 앞에 그대로 드러나기를 청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런 심정에 대해 우리의 이웃들로 하여금 기꺼이 보도록 하는 것 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8:2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왜냐면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가 정직하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친구가 우리에게 어떤 잘 못에 대해 알려 준다면, 우리는 그 꾸지람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하며 말해진 것을 인정하는가? 우리는 그보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지는 않는가? 여러 해 동안 저자는 가치가 있는 질책에 대해 매우 감사해왔다. 잘못은 가치가 없는 비난에 있다, -즉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거짓됨 안에 있다.
<9:5>
모든 기도에 대한 시험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 안에 있다: 우리가 이런 요청으로 인해 우리의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가? 우리의 기도와 일관되게 삶으로써 우리 요청의 성실성에 대한 증거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위한 기도를 했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옛날부터의 이기심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이기심이 친절함에 그 자리를 내 주었다면, 우리는 우리 이웃을 비이기적인 관점에서 대하게 될 것이며,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단순히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요청함만으로는 이런 위대한 임무에 응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희망과 믿음의 열매를 누릴 수 있게 될 수 있기 전에 들어 매야만 하는 십자가가 있다.
당신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당신의 하나님을 사랑 하는가?” 이 계명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즉 모든 단순한 물질적 감각과 애정과 예배의식을 포기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황금향이다. 그것은 생명의 과학을 수반하며, 영의 신성의 지배만을 인정하는데, 그 안에서는 혼이 우리의 주인이며, 물질적 감각과 인간적 의지는 있을 자리가 없다.
<9:25>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즉 진리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함으로써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고자 하는가? 아니다! 당신은 정말로 이 지경에 이르기를 갈망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의 친애하는 주님의 발자국을 좇아가는데 관심도 없으면서, 왜 그것에 대해 긴 기도를 하며 그리스도교인이 되기를 구하는가? 만일 그의 본보기를 따르고자 하지 않는다면, 왜 당신은 그의 본성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기를 입술로 기도를 하는 것인가? 일관성 있는 기도는 올바로 행하겠다는 갈망이다. 기도는 우리가 피를 흘리는 발걸음으로라도 우리가 빛을 받을 수 있는 한 그 빛 안에서 걷고 또 걷겠다고 갈망함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인내심을 가지고 모심으로써, 우리의 진짜 갈망이 하나님에 의해 보상받도록 남겨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10:5>
세상은 기도에 대한 영적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여야만 한다. 만일 예수님의 세상적인 슬픔의 잔으로부터 덕을 볼만큼 선하다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슬픔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탱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신성적인 면에서 그렇듯 자질이 갖추어지고 그분의 잔을 기꺼이 마시고자 하게 되기 전에는, 수백만 번의 헛된 반복이 기도 안으로 권능의 실증과 “그 따르는 표적”을 통해 성령의 기름을 절대로 부어 넣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세상과 육신과 악을 이기고, 그리하여 모든 오류를 파괴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추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분투함이 바로 우리를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영적으로 달성함이 신성의 생명에 대한 더 높은 깨달음으로 향한 문을 열어준다.
티베트에서의 예배 형태들 가운데 하나는 기도하는 기계를 들고 거리를 다니며 대문 앞에 멈춰서 그 기계를 돌려 기도를 만들어내고 돈 한 푼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전진을 위해 선발대로 온 병정이 기도의 특권을 위해 박해라는 대가를 치렀다.
<10:22>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기도에서 구하는 축복을 항상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모든 좋은 것들과 축복받음의 근원과 방도에 대해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분명히 받아야만 할 것이다. 성경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너의 정욕에다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과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는 것이 항상 우리에게 최선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무한한 사랑이 요청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지혜에게 자비롭기를 그리고 죄악을 벌하지 않기를 구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잘 못 구하는 것이다.” 처벌이 없이는 죄악은 불어난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또한 용서의 조건을 명시하였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할 때, 그는 “가라,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11:5>
판사는 때때로 형벌을 감면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범법자에게 윤리적 이득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잘해봐야 단지 범법자를 한 형태의 처벌로부터 구해줄 뿐이다. 무죄를 선고하거나 유죄를 선고할 권리가 있는 윤리의 법은 인간들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 갈” 수 있게 되기 전에 배상할 것을 언제나 요구한다. 이 진전을 강제하기 위해서 범해진 법은 처벌을 가져온다.
단순한 법적인 용서 (그리고 다른 용서는 없는데, 그것은 신성의 원리는 우리의 죄악이나 실수가 고쳐질 때까지는 절대로 그것들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만일 그가 참으로 혐오감을 가지고 악으로부터 돌아설 만큼 이미 충분하게 고통을 받지 않았다면, 범법자로 하여금 범법행위를 반복하도록 풀어 놓아준다. 진리는 오류에 대해 조금도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없애 버린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으셨는데, 각 개인의 죄악에 내려진 신성의 언도를 무효화시키기 위함은 아니었다, 왜냐면 죄악은 필연적인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탄원은 인간들에게 단지 인간 자신들의 믿음의 결과들만을 가져온다. 우리는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거룩함을 획득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거룩함을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갈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함으로 가는 유일한 실용적인 길로 확실하게 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꺼이 이를 행하여야만 한다. 기도가 변경할 수 없는 진리를 변화시킬 수는 없으며, 기도만으로는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줄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열렬한 습관적인 갈망을 동반한 기도가 우리를 모든 진리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런 갈망은 소리로 들을 수 있는 표현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과 생활을 통해서 가장 잘 표현된다.
<12:1>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 치유하는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병든 자를 치유해주시라는 단순한 요구는 항상 함께 하시는 신성의 임재를 그 이상으로 더 얻을 수 있는 힘이 없다. 병든 자를 위한 그러한 기도의 이로운 효과는, 하나님에 대한 맹신을 통해 그것이 육신에 더욱 강하게 작용하도록 하며,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믿음이 다른 한 믿음을 쫓아내는 것, 즉 미지의 것에 대한 믿음이 질병에 대한 믿음을 쫓아내는 것이다. 맹목적 믿음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은 과학도 진리도 아니며,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바와 같은 신성의 치유 원리에 대한 인간적인 깨달음도 아닌데, 예수님의 겸손한 기도들은 진리, 즉 사람의 하나님의 모습임 그리고 사람의 진리와 사랑과 하나임으로부터 오는 심오하고 진지한 항변들이었다.
물질적인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병든 자에게 마치 하나의 의약과 같은 작용을 하는데, 그것은 그것 자체의 효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의 힘을 인간의 신앙과 믿음으로부터 빌려올 뿐이다. 의약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것에는 어떤 이지(理智)도 없기 때문이다. 의약으로 하여금 외관상 독성이 있든지 치유하는 힘이 있게 하는 것은 신성의 원리나 사랑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적인 믿음일 뿐이다.
병든 사람의 회복을 위한 기도의 보통의 관습은 맹목적인 믿음 안에서 도움을 찾는다, 그런데 도움은 깨우침을 가진 이해로부터 와야만 한다. 믿음 안에서의 변화는 끊임없이 계속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적 사고로부터 나오는 상품일 뿐 신성의 과학의 생성물이 아니다.
<12:27>
하나님이 어느 한 숭배자를 위해서는 개입하고, 같은 정도의 기도를 바치는 또 다른 사람은 돕지 않으실까? 병든 사람들이, 그들이 기도를 했기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기도를 해주었기 때문에 회복된다면, 오직 탄원하는 사람들 (당사자 또는 대리인)만이 나아야 한다. 신성의 과학 안에서는, 그곳에서는 기도들이 심적인 바, 모두가 하나님을 “어려움 안의 확실한 도움”으로서 자신들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사랑은 그것의 적응과 부여에 있어서 치우침이 없고 보편적이다. 그것은 “목마른 자는 누구나 물가로 오라”고 외치는 열려있는 샘물이다.
<13:5>
공중(公衆) 앞에서 하는 기도에서 우리는 흔히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을 넘어서, 즉 열렬한 갈망에서 오는 정직한 관점을 넘어서 나아간다. 만일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해, 보이지 않게 열망하고 드러나도록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들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헛된 반복”이다. 만일 우리의 탄원들이 진지한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드러나게 갚아주실 것이다. 단지 공중 앞에서 하는 우리 갈망들에 대한 표현이 그것들을 증가시킬 수 있는가? 생각보다 말에 의해 전능하신 귀를 더 빨리 얻는가? 만일 기도가 진지하다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또는 우리네 동료 인간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만일 우리가 그 소망을 정직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마음속에 품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진짜 소원들을 쏟아내는 말들로 압도해버리는 위험을 덜 초래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하나의 육신적 인격으로서의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믿음에 따르는 인간적 의심과 두려움을 버리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래서 우리는 무한한 비육신적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이로운 일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데, 이 사랑에게는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 신성의 원리, 즉 사랑에 대한 인간의 무지로 인하여, 만유의 아버지는 육신적 창조자로 표현 된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자신들을 단지 육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반영으로서의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의 영원한 비육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무지하다. 오류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 즉 사람의 존재의 실재성에 대해 무지하다, 왜냐면 감각의 세계는 육신 안이 아닌, 혼 안의 생명을 인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14:1>
만일 우리가 지각할 수 있을 만큼 육신과 함께 있고, 우리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대상인 그 전능자를 육신을 가진 물질적 존재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영을 실증함에 있어서 “육신으로부터 떨어져 주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과 같이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황홀경이나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통해 밝혀진 대로의 생명에 대한 실제적 실증과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에 복종함, 즉 신성의 사랑에 의해, -물질이 아닌 영에 의해 절대적으로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생명과 이지가 순전히 영적이라는 것, -즉 물질 안에 있지도 또 물질로부터 연유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라, -그러면, 육신은 어떠한 불평도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프다는 믿음으로 인한 고통이라면, 당신 자신이 갑작스레 낫게 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육신이 영적인 생명, 진리 그리고 사랑에 의해 다스려질 때, 슬픔은 기쁨으로 변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즉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자아가 육신에 있지 않고, 진리와 사랑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는 혼의 기도이지, 물질적 감각의 것이 아니다.
영적 깨달음과 사람의 온 세상에 대한 지배권에 대한 의식을 밝혀주는, 신성의 생명은 물질적인 삶에 대한 믿음과 꿈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 깨달음이 오류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한다, 그리고 이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할 수 있다.
<14:31>
“너는 기도할 때에 너의 골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고 은밀히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15:1>
이렇듯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골방은 영의 지성소를 상징하는데, 그 문은 죄 많은 감각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만 진리와 생명과 사랑은 받아들인다. 그 문이 오류에 대해서 닫혀져 있다면, 진리에 대해서는 열려있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은밀히 계신 아버지는 육신적 감각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며, 말에 의해서가 아니고, 동기에 의해 갚아주신다. 기도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잘못된 감각의 문은 닫혀져 있어야만 한다. 사람이 모든 오류를 파괴하는 영, 즉 신성의 원리인 사랑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입은 다물어져 있어야만 하고 물질주의는 침묵해야만 한다.
올바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야만 한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물질적 감각들을 침묵시켜야만 한다. 진지한 갈망의 조용한 지성소 안에서 우리는 죄악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전체이심을 주장해야만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지혜, 진리 그리고 사랑을 위해 수행하고 경계하는 정직한 심정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만” 한다. 그러한 기도는, 우리가 우리의 열망들을 실행으로 옮기는 한 응답된다. 주님의 명령은, 우리가 은밀히 기도하고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우리의 성실성을 입증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세상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은밀한 아름다움과 보상 안에서 기뻐한다. 자신을 망각함, 순수함, 그리고 애정이 끊임없는 기도들이다. 공언(公言)이 아닌 실천, 믿음이 아닌 깨달음이 전능자의 귀를 빌리고 바른 손의 도움을 받도록 하며, 그것들이 확실하게 무한한 축복을 불러 내린다. 믿음직함이 깨인 신앙의 기반이다. 거룩함에 적합함이 없이, 우리는 거룩함을 받을 수 없다.
<16:1>
물질적인 것들의 커다란 희생이 이 고도의 영적 깨달음에 앞서야만 한다. 가장 고차원의 기도는 단순히 믿음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실증이다. 그러한 기도가 병을 치유하고 죄와 사망을 파괴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무죄한 진리와 죄 많은 감각의 거짓됨 사이를 구별한다.
우리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의 짤막한 기도를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그분의 이름을 따라 주기도문이라고 한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고 인간의 모든 필요를 망라하는 그 기도문을 주셨다. 물론 마지막 문장이 후세의 필사생(筆寫生)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에 대해 성경학자들 사이에 의문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기도 자체의 의미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구절은 원전을 정확히 읽으면, “우리를 악한 존재로부터 구하소서”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 그 탄원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강화시켜준다, 왜냐면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악한 존재” 또는 유일한 악이란 처음 거짓말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물질적 관능과 죄악을 초월함에 따라서만,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열망과 영적 의식(意識)에 다다를 수 있는데,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가리키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병든 사람을 즉시로 고치는 것이다.
<16:24>
여기에서 주기도문의 영적 의미라고 내가 이해하는 바를 말해보고자 한다.

하늘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의 부모님이신 하나님, 전적으로 조화로우시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받들어 모셔야 할 단 한 분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은 이미 임하였으며, 아버지께서는 항상 현존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최고이심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주옵시고, 굶주린 애정을 채워주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
사랑은 사랑을 통해 반영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죄악과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모든 권능이시며, 모든 생명이시고 진리이시고 사랑이시며, 일체의 일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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