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1일 금요일

제 3 장 결혼

제 3 장 결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느니라.
부활 때에는 그들은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 - 예수

<56:1>
우리의 위대한 스승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오셨을 때, 요한은 깜짝 놀랐다. 그의 생각을 읽고, 예수님은 덧붙여 말씀하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어떤 경우에 있어서의) 물질적 방법에 대한 양보는 영적 선(善)의 촉진을 위한 것이었다.
결혼은 인류의 생식을 위해 주어진 합법적이고 도덕적인 규정이다. 영적 창조가 온전하다는 것이 분별되고, 터득되고 깨달아지기까지는, 그리고 계시록의 환상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창조에 대한 육신적 의미가 내어 쫓기고 그것의 영적 의미가 하늘로부터 게시 되는- 하나님의 왕국이 오기 전까지는, 점점 높아지는 미덕(美德)을 보장하는 도덕적 규칙을 따르며, 결혼은 지속 될 것이다.
결혼 서약에 대한 배신은 모든 족속들에게 있어서의 사회적 재앙, 즉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 백주에 황폐하게 하는 파멸”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못지않게 엄중한 것이다.
<57:1>
정절은 문명과 진보의 접합제이다. 그것이 없이는 사회의 안정성이 없고, 그것이 없이는 사람이 생명의 과학을 이룰 수도 없다.
남성적 자질과 여성적 자질의 결합이 완전성을 이룬다. 남성적 마음은 여성적 마음의 어떤 요소들을 통하여 더 높은 품격에 이르고, 반면에 여성적 마음은 남성적 자질을 통하여 용기와 힘을 얻는다. 이러한 다른 요소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결합한다, 그리고 그들의 참된 조화는 영적 일치에 있다. 양성(兩性) 모두 사랑스럽고, 깨끗하고, 부드럽고, 강해야 한다. 타고 난 자질들 사이의 끌림은 그것이 순수하고 참되어야만 영원할 것이며, 돌아오는 봄과 같은 다시 새롭게 되는 달콤한 시절들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이나 부유함이나 명성은 애정의 요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없으며, 이지와 선함과 미덕의 더 나은 주장과는 절대 비교되어서는 안 된다. 행복은 진리와 사랑으로부터 태어나는,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비이기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인류가 그것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적인 애정은, 그것에 대한 갚음이 없다 해도, 헛되이 쏟아 부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성질을 풍요롭게 하는데, 그것을 넓히고, 정화하며, 고양시킨다. 지상의 삭풍이 애정이 피운 꽃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그것들을 바람에 흩날려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육신적 관계의 단절은 생각을 하나님께 더욱 가깝게 결합시킨다. 왜냐면 사랑이 몸부림치는 심정을 그것이 세상일에 대해 한탄하기를 그치고 그것의 날개를 천국을 향해 펼치기 시작할 때까지 지탱해주기 때문이다.
<57:31>
결혼은 그것에 수반되는 실망들이나 그것이 충족시켜주는 희망들에 따라 축복 받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축복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생존을 고양하는 데 순응하는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교유로써 생존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회의 동기가 되어야만 한다. 영의 일치가 즐거움에 새로운 날개를 달아준다, 그렇지 않으면 즐거움의 처진 날개는 흙먼지 안에서 끌리게 된다.
<58:5>
잘못 편곡된 선율은 불협화음을 만들어 낸다. 인간적 마음의 음조들은 서로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적절히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조화로워야만 한다. 비이기적인 열망, 고귀한 삶의 동기, 그리고 순수성, -이러한 생각의 구성요소들이 서로 섞이면서, 개별적 그리고 집단적으로 참된 행복과 힘과 영속성을 이룬다.
혼에는 윤리적 자유가 있다. 상대방의 모든 시간과 생각들을 이기적으로 강요함으로써 바람직한 전망을 가진 앞길을 좁게 만들지 말라. 더해지는 기쁨들로, 선의(善意)가 더욱 더 확산되어야 한다. 아내나 남편을 방안에 영원히 잡아 두려고 하는, 편협함과 질투하는 마음은, 신뢰와 사랑을 달콤하게 서로 주고받는 것을 증진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가정 바깥에서의 끊임없는 즐거움에 대한 종잡을 수 없는 갈망은 결혼의 행복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조짐이다. 가정은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이다, 그리고 그것은 애정의 중심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한계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농가의 신부가 자신의 연인에게, “두 사람이 같이 먹는 것이 둘이 따로 먹는 것보다 많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이 아내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공급한다고 해서, 천박한 낭비나 멍청한 편안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암시를 준다. 부요함이 노고(勞苦)의 필요나 결혼관계에 있어서의 좋지 않은 성향 피하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무엇도 결혼에 있어서의 서로보살핌을 쓸모없게 만들 수는 없다.
<58:31>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까 염려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기에 가장 즐거운 일이다. 결혼생활에 있어서 쌍방에 부과되는 지속적인 의무를 충분히 인정함이 없이는 그것을 절대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서로의 행복을 위한 가장 애정 어린 염려가 있어야만 하고, 상호간의 배려와 인정이 결혼 생활 전 기간에 걸쳐 따라야만 한다.
<59:7>
흔히는 서로 타협하는 것이, 그것이 없이는 참아내기 어렵게 될 결혼 계약을 유지시켜 줄 것이다. 남편은 가정 경제에 있어서의 모든 성가신 일들과 근심거리들에 참견하도록 요구 되어서는 안 되고, 아내는 정치적 경제를 이해할 것으로 기대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결합된 영역으로부터 나오는 각기 다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각자가 상대를 지탱해주는 상태에서 그들의 서로에 대한 호의가 달콤한 신뢰와 격려 안에서 융합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관심과 애정의 화합을 신성하게 만드는데, 그 화합 안에서 심정은 평화와 가정을 발견하게 된다.
부드러운 말들과, 당신의 부인의 복지와 행복을 증진하는 것들 안에서의 비이기적인 보살핌이 완고한 무관심과 질투보다 그녀의 건강과 미소를 늘이는데 더 유익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남편들이여, 이 말을 들어라 그리고 작은 말 한 마디나 행동이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를 어떻게 다시 시작하게 해줄 수 있는지를 기억하라.
결혼 후에는, 성격이 맞지 않음에 대해 불평하기에는 너무 늦다. 이런 결합이 있기 전에 상호이해가 있어야만 하고 후에도 계속되어야만 한다, 왜냐면 속임은 행복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59:27>
혼인의 서약은, 그것의 도덕적 의무가 온전히 지켜지는 한, 절대로 무효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혼의 빈도수가 이 관계의 성스러움이 그것의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고, 치명적인 실수들이 그것의 기반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남편과 아내 모두 진정한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들이라면, 헤어짐이 결코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과학이 필연적으로 조화와 행복의 척도 상에서 사람의 존재를 더 높게 들어 올린다.
<60:4>
비슷한 취미들과 동기들과 포부들이 행복하고 영구적인 동반자관계를 구성하는데 필요하다. 성격의 아름다움이 또한 애정의 고리를 풀어지지 않게 녹여 붙이는 선(善)이다. 어머니의 애정은 아이로부터 떼어놓아질 수 없다, 왜냐면 어머니의 사랑은, 순수함과 한결같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둘 모두 불멸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애정은 어떤 난관에서도 계속 살아나간다.
일들이 벌어지는 논리로부터 우리는 이기심과 불순함만이 무상한 것이라는 것과, 지혜가 맺어주지 않은 것들은 지혜가 궁극적으로 갈라놓을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
결혼은 악을 막아주는 장벽이 되고, 여성에게는 보호가 되고, 남성에게는 힘이 되고 애정의 중심이 됨으로써 인류를 향상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그것의 현재의 경향이 아닌데, 왜일까? 그것은 더 고상한 성격의 교육이 소홀히 여겨지고, 다른 고려사항들이 -즉 열정, 경박한 오락, 개인적인 장식, 과시 그리고 거만함- 생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율되어 있지 않은 귀는, 조화를 식별하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화음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육신적 감각은 존재의 참된 행복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것을 잘못된 기초 위에 놓는다. 과학이 이런 부조화를 교정하고, 우리에게 더 감미로운 조화들을 가르쳐준다.
<60:29>
혼은 인류를 축복할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행복이 만일 혼 안에서 추구된다면, 더 즉각적으로 얻어지고, 우리가 유지함 안에서 더욱 안전할 것이다. 더 고차원적인 즐거움들만이 불멸인 사람의 갈망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개인적 감각의 한계내로 제한 할 수 없다. 감각들은 참된 기쁨을 주지 않는다.
<61:4>
인간적 애정 안에서의 선(善)이 악보다, 영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보다 우세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은 결코 얻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천상적인 조건에 도달함이 우리의 자손을 개선하고, 범죄를 감소시키며 포부에 더 고상한 목적을 줄 것이다. 죄의 모든 골짜기는 돋우어져야만 하고, 이기심의 모든 산들은 깎여 낮추어져야만, 우리 하나님의 대로(大路)가 과학 안에서 준비될 것이다. 천상적 마음을 가진 부모들의 소생은 더한 이지, 더 좋은 균형 잡힌 마음과 더 건전한 체질을 물려받는다.
만일 어떤 우연한 정황이 전도가 유망한 어린아이들을 천박한 부모들의 팔에 맡긴다면, 대개 이런 아름다운 아동들은 알프스의 눈 속에 피어난 열대의 꽃들처럼 어려서 시들고 죽고 만다. 만일 혹시라도 그들이 자신들이 부모가 되도록 까지 산다면, 자신들의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아이들 안에 그들 조상들이 가졌던 천박한 성질을 재생할 수도 있다. 행복을 위한 무슨 희망으로, 즉 무슨 고상한 포부로, 극복되어야만 하거나 아동을 혐오스러운 파멸로 전락시키는 성벽(性癖)을 이어받은 아동에게 영감을 줄 수 있겠는가?
人間種의 번식이 당신 정원을 가꾸는 것이나 당신의 소 떼와 양 떼를 늘리기 위해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더 중대한 책임, 즉 더욱 엄숙한 의무가 아닌가? 영속시킬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어떤 것도 아동들에게 전해져서는 안 된다.
<61:29>
인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인간 형성이 크게 개선되어야만 한다. 결혼의 과학적 정신상태는 영적 일치이다. 만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더 높은 급의 人間種의 번식이 요구된다면, 그것의 물질적 조건이 오직 번식을 위해서만 허용될 수 있다. 태아는 정신적으로 순수상태로 유지되어야만 하고, 임신기간은 처녀성의 성결함을 가져야만 한다.
<62:4>
아동들의 전체적인 교육은 윤리적이고 영적인 법에 복종하는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어야만 하는데, 그 법으로써 아동은 소위 물리적 법들, 즉 질병을 야기하는 믿음을, 직면하고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만일 부모들이 자신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끊임없는 즐거움에 대한 갈망이나, 항상 먹여주거나, 안아서 흔들어 주거나, 까불어 주거나, 말을 걸어주도록 갈망하는 마음을 생기게 한다면, 후일 그 부모들은 자신들이 야기한 자기 아이들의 불평 많음이나 경솔한 성질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 “생명에 대해서, 너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 것인가”에 대해 덜 생각하고;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를 덜 생각하는 것이 당신이 꿈꾸는 것보다 훨씬 더 자라는 세대들의 건강을 위해 작용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지식에 있어서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도록 허용되어야 하며, 사람의 고차원적 본성을 깨달음 안의 성장을 통해서만 남녀 성인이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현명하고 건강하고자 한다면, 더욱 더 많은 이지를 물질에 더욱 기인한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더욱 더 적게 돌려야 한다. 꽃봉오리와 꽃을 형성하는 신성의 마음이 마치 백합화를 옷 입히듯 인간의 육신을 돌보아 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도 그릇된 인간적 개념들의 법칙을 강요함으로써 하나님의 정부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라.
<62:27>
사람의 고차원적 본성은 저차원의 것으로 다스림 받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지혜의 질서는 뒤집어지고 말 것이다. 생명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관점은 영원한 조화를 감추고, 우리가 불평하는 병들을 만들어 낸다. 필멸의 존재들이 물질적 법칙들을 믿고 마음의 과학을 배격한다고 해서 이것이 물질성을 맨 앞에 오도록 하고 혼의 우월한 법칙을 마지막이 되도록 하지는 않는다. 여러분이 존재에 관한 과학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폐병을 물리치는데 플라넬이 마음을 통제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결코 생각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63:5>
과학 안에서 사람은 영의 소생이다.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순수한 것이 사람의 조상을 이룬다. 그의 근원은 필멸인 인간들의 근원처럼 동물적 본능에 있지 않고, 또한 사람이 이지에 도달하기에 앞서 물질적 상태를 거쳐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영이 그 존재의 근본적이며 궁극적인 근원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시고, 생명이 그의 존재의 법칙이다.
민법은 남녀 양성(兩性)의 권리 사이에 매우 부당한 차별을 두고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그러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어떠한 선례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명은 그것을 어느 정도 완화시킨다. 그러나 아직도 어떻게 되어 관습이 크리스천 사이언스나 문명이 여성에게 부여하는 것보다 더 작은 권리를 부여하는지 놀랄 만한 일이다.
인권과 재산권과 양성(兩性)의 양육권에 대한 주장에 대해 우리의 법들은 아무리 줄잡아 말한다 해도, 비편파적은 아니다. 만일 여성의 선거 투표권이 더 큰 규모의 어려움들을 야기함 없이 그 악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허용되기를 희망하자. 현재에 있어서 개선을 위한 가능할 뿐 아니라 도리에 맞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사회를 고양시키는 것과 입법을 위한 보다 고상한 경주, - 즉 더 고상한 목적과 동기를 가진 경주를 달성하는 것이다.
<63:28>
만일 방탕한 남편이 그의 아내를 버린다면, 그 피해를 입고 아마도 빈곤 상태에 빠졌을 여자는 분명하게 그녀 자신의 임금을 지급받도록, 사업 협정을 맺을 수 있게 되도록,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며, 자금을 예금할 수 있고, 간섭 없이 자신의 아이들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 되어야만 한다.
<64:1>
균등한 정의의 결여는 인간의 이기심과 비인간성에 기인한 내버려둘 수 없는 악폐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ꡒ하나님과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렵혀지지 않은 종교 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 중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아보는 것과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흠 없이 지키는 것이라.ꡓ고 말한 사도 야고보의 가르침의 지침을 따라 자신들의 신앙을 행사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자만심이나,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의식(儀式)의 주관자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원시의 기독교 신앙을 배제한다. 역경과 홀로 고투하는 어떤 고상한 여인에게 어떤 남성이 도와주는 손을 내밀 때, 그의 아내는, ꡒ당신 이웃의 일에 끼어들어 좋을 일이 결코 없다.ꡓ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아내는 때로 탐욕스런 집안의 독재자에 의해 그녀의 동정심과 자비심이 해 줄 수 있는 금방 베풀 수 있는 도움 주는 것을 금지 당하기도 한다.
결혼은 마음의 결합을 의미해야만 한다. 더욱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의 때가 오는데, 그가 선언하시기를 부활 안에서는 결혼을 하지도 않고, 결혼을 시켜지지도 않을 것이며, 사람이 천사처럼 되리라고 하셨다. 그렇게 되면 혼은 스스로의 안에서 즐거워 할 것이며, 그 안에서는 격정이 있을 자리가 없다. 그러면 흰옷을 입은 순수함이 한 사람 안에서 남성적 현명함과 여성적 사랑을, 즉 영적 깨달음과 영속적 평화를 결합시킬 것이다.
하나님이 모두의 아버지시라는 것이 알아지게 될 때까지, 결혼은 계속 될 것이다. 인간들로 하여금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나쁜 상태로 이끌 수도 있는 법의 경시를 허용하도록 하지 말자. 정직과 미덕이 결혼 협약의 안정성을 보장한다. 궁극적으로 영이 자신의 것 -즉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 -을 요구할 것이며 육신적 감각의 목소리들은 영원히 입 다물게 될 것이다.
<65:1>
경험이 미덕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야만 하며, 인간적 행복은 사람의 가장 높은 본성으로부터 유래하여야만 한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모든 혼례의 단에 계셔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하도록 해주시기를, 그리고 그로 인하여 사람의 영적이고 영원한 존재가 분별될 수 있는 영감을 인간의 삶에 주시기를 바란다.
만일 인간적 애정의 기초들이 항상 진보와 보조를 같이한다면, 그것들은 견고하고 오래 계속될 것이다. 이혼들이 이 시대에 결혼 상태 안의 어떤 근본적인 오류에 대한 경각심을 주어야만 한다. 이성간의 결합은 두려운 부조화의 고통을 겪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그것의 조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인생이 더욱 형이상학적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오늘날 이렇듯 분명히 보이는 널리 퍼진 악의 권능들은 이 시대의 물질주의와 감각주의를 통하여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며, 다가오는 영적 시대를 대항하여 싸운다. 세상의 그리스도교 정신의 결여와 가정을 행복하게 할 서약의 무력함을 보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은 마침내 더욱 차원 높은 애정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맑게 걸러낸 진리와 지게미에 남겨진 불순과 오류를 얻게 될 때까지, 다른 많은 개혁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해서도 발효작용이 뒤따를 것이다. 액체의 발효 작용도 유쾌하지는 않다. 안정되지 않은 과도기적 상태는 그것 자체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 때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고정된 사실이었던 결혼생활은, 현재의 불안정한 발판을 벗어나야만 하고, 사람은 좀 더 영적인 정절 안에서 영속성과 평화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부부간의 불성실을 표면 위로 끌어내는 정신적 화학작용이 틀림없이 이 악을 던져내 버릴 것이며, 찌꺼기가 없어지게 되면 결혼은 더 순결해 질 것이다.
<66:1>
인류의 위대한 시인인 불멸의 섹스피어여, 그대가 옳았다:

두꺼비처럼 밉고 독이 있지만
그 머리에는 귀한 보석을 쓰고 있는
역경의 효과는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시련이 인간들에게 물질적 막대기, -즉 심장을 꿰뚫는 부러진 갈대에 의지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즐거움과 번영의 햇볕 안에서는 이것을 절반도 기억하지 않는다. 비통은 유익한 것이다. 커다란 고난을 통해 우리는 왕국으로 들어간다. 시련들은 하나님이 돌보심의 증거이다. 영적인 발전은 물질적 희망들이라는 토양에 뿌린 씨앗으로부터 싹트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썩을 때, 사랑이 영의 더 높은 즐거움들을 새롭게 전파하는데, 이것들에는 땅으로부터의 어떤 오염됨도 없다. 경험의 각각 연속적인 단계가 신성의 선함과 사랑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을 펼쳐 보인다.
결혼의 행복에 대해 감사함의 가운데에서, 인간의 기쁨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기억해보는 것이 좋다. 결혼의 불행 가운데서는, 희망하고 기도하며 길을 가리켜줄 신성의 지혜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남편들과 아내들은 헤어질 것에 대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요구가 없다면, 결코 헤어져서는 안 된다. 아내가 서둘러서 남편을 떠난다든지, 남편이 아내를 떠나는 것보다는 당연한 귀결로 일어나게 되는 일들을 기다리는 편이 더 낫다. 만일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낫다면, 그 다른 편이 더 좋은 짝을 훨씬 필요로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상황 하에서 인내심을 유익한 것으로 간주하며, 크산티페를 자신의 철학을 위한 단련으로 여겼다.
<66:30>
비애는 자신의 보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겪었던 곳에 그대로 우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용광로가 황금에서 불순물을 분리해내서 그 고귀한 금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질 수 있도록 한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우리가 마시고 그분이 가르치시는 교훈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67:4>
대양이 태풍으로 휘저어질 때, 구름은 내리 덮치고, 바람은 팽팽해진 돛대의 밧줄을 통해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파도는 스스로를 산덩이처럼 들어 올린다. 우리는 키잡이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아는가? 당신은 폭풍 중에서도 안전하게 조종할 수 있는가?” 그는 용감하게 대답하지만, 겁은 모르는 뱃사람마저 자신의 안전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항해의 과학은 마음의 과학과 동등하지 않다. 그러나 그 선원은 자신의 가장 높은 수준의 이해도에 따라 맡은 임무의 위치에서 단호하게 일을 계속하며 결말을 기다린다. 우리도 소용돌이치는 비통의 대양에서 그렇듯 처신해야만 한다. 희망하고 일하며, 저항할 수 없는 추진력이 그의 파멸을 재촉하든 아니면 햇빛이 성난 바다를 기쁘게 할 때까지 난파선의 잔해에 매달려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주님이며 주인이 영적 고양을 통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켰으며, 그리고 바람과 파도까지도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을 기억할 때, 동물적 본성이 어떻게든 성품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견해는 너무 어리석어서 고려할 수도 없다. 은혜와 진리가 다른 모든 수단들과 방법들을 초월하여 막강하다.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의, 제한된 실증 안에서의 영적 권능의 결여됨이 여러 세기에 걸친 노고를 침묵시키지 않는다. 육신적 의식이 아닌 영적 의식이 필요하다. 죄와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구원된 사람이 참된 닮음, 즉 영적 이상을 제시한다.
<67:30>
종교와 의학의 제도들은 육신의 고통과 쾌락을 치료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그러한 원인이나 결과로부터 오는 고통을 꾸짖으셨다. 존재에 대한 진리를 깨달음이 참 종교의 바탕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현재 인간들은 우스꽝스럽게 생각될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느리게 진보한다. 그들은 유행과 자만심과 감각의 노예이다. 언젠가 우리는 영, 즉 위대한 건축가가 과학 안에서 어떻게 남자들과 여자들을 창조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상한 것과 그릇된 것에 싫증을 내야만 하고 우리의 최상의 자아를 저해하는 것은 그 무엇도 소중히 여겨서는 안 된다.
<68:9>
질투심은 애정의 무덤이다. 마땅히 신뢰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불신의 존재는 에덴동산의 꽃들을 시들게 만들고 사랑의 꽃잎을 흩으려 썩도록 만든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하는 선서를 하는 것을 서두르지 말라. 그것의 의무들, 그것의 책임들, 그리고 그것의 당신의 성장과의 관계들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치는 당신의 영향과의 관계들을 생각해 보라.
나는 한 사람만 빼고 그 누구도 무성생식을 믿는 사람을 알지 못 한다; 그녀는 사랑스런 성격을 가진 미혼이었고, 정신병 초기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가 그녀를 치유했다. 나는 내 빵을 강물에 던질 때, 그녀의 경우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선한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게 하도록 하고, 악한 사람들은 그들의 어리석은 빈정거림과 거짓말을 꾸미도록 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건전한 동기가 때로는 이런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싹이나 세포분열에 의한 식물 種의 영구보존은 분명하지만, 무성생식이 인간 종에게 적용된다는 믿음은 믿지 않는다.
<68:27>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증가가 아닌 전개를 드러낸다; 그것은 분자로부터 마음으로의 물질적 성장을 나타내지 않고, 신성의 마음이 사람과 우주에게 나누어 줌을 나타낸다. 인류의 생식이 그침에 비례하여, 영원하고 조화로운 존재의 단절 없는 고리가 영적으로 식별될 것이다; 지상의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과 공존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사람과 우주는 영으로부터 전개되었으며, 따라서 영적이라는 과학적 사실은, 마치 인간들이 죄와 질병에 대한 감각을 상실함에 따라서만 건강에 대한 감각을 얻는 다는 증거처럼 신성의 과학 안에서 확고하다. 인간이 창조자라고 믿는 한은 필멸의 존재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창조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이 존재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어야만 비로소 인식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실재하는 이상적인 사람은 거짓되고 물질적인 인간이 사라지는 것에 비례하여 나타난다. 더 이상 결혼하지도 “결혼 시켜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인간의 연속성을 끝막음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무한한 계획안에서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관한 그의 의식을 끝막음하지도 않는다. 단 한 분뿐인 창조자, 즉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영적으로 깨달음이 모든 창조를 펼쳐내고, 성경 말씀을 확인하며, 헤어짐도 고통도 없다는 것에 대한, 그리고 죽음도 없고 완전하고 영원한 사람에 대한 즐거운 보장을 해준다.
<69:17>
만일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들이 자신들의 자식을 영적으로 교육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영적으로 교육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 창조에 대한 과학적 의미와 모순을 일으킬 수도 없을 것이다. 언젠가 아이가 자신의 부모에게 “부모님은 제일 계명을 지키십니까? 부모님은 유일한 하나님과 창조주를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면 사람이 창조자인가요?” 라고 물을 것이다. 만일 아버지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창조하신단다.”라고 답한다면, 아이는 “아버지는 영이 물질적으로 창조한다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물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물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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