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1일 금요일

제 4 장 크리스천 사이언스 對 심령론

제 4 장 크리스천 사이언스 對 심령론

그 때에 그들이 너에게 말하기를 “신접한 자들과
엿보고 중얼거리는 마술사들에게 구하라.”하리라.
백성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
- 이사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지키면
그는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주께 말하기를,
이제 우리는 네가 마귀들린 것을 알게 되었노라고 하더라.
- 요한복음

<70:1>
필멸의 존재는 하나의 불가해(不可解)다. 나날이 수수께끼이다. 육신적 감각들의 증언은 우리에게 무엇이 실재하는 것이고 무엇이 미혹(迷惑)인지 알려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계시가 진리의 보고를 열어준다. 그릇되거나 죄가 있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영의 영역 안으로 절대로 들어 올 수 없다. 오로지 하나의 영만이 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영적 사람은 하나님을 반영한다. 이 과학적 반영 안에서 자아와 아버지는 분리될 수 없다. 육신을 가진 존재들이 영들이라든지, 선하고 악한 영들이 있다는 가정은 잘못이다.
신성의 마음이 풀잎 하나로부터 별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체성들을 각각 별개이고 영원한 것으로서 보전해 준다. 물어봐야 될 것들은; 하나님의 정체성들은 무엇인가? 혼은 무엇인가? 생명이나 혼이 형상화된 사물 안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71:1>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이디어 외에는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 - 즉 그 외에는 어느 것도 영이 아니다. 악에는 실재성이 없다. 그것은 사람도 아니며, 장소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다, 다만 단순한 하나의 믿음, 즉 물질적 감각의 허상일 뿐이다.
모든 실존하는 것들의 정체성, 즉 아이디어는 영원히 지속된다; 그러나 영, 즉 모든 것의 신성의 원리는 영의 형성물 안에 있지 않다. 혼은 영, 하나님, 즉 한정적인 형상의 바깥에 있는 창조적인 통치하는 무한한 원리와 동의어인데, 형상들은 그것을 단지 반영할 뿐이다.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당신이 꽃 한 송이를 본다고, -그것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는다고 꿈꾸어 볼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당신은 꽃이 소위 마음의 생성물이라는 것을, 즉 물질의 생성물이라고 하기 보다는 생각의 형성물이라는 것을 배운다. 다시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풍경들과 남자들과 여자들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것들 역시 영상들로서, 이것들을 인간의 마음이 간직하고 전개한다는 것과 이것들이 마음, 생명, 그리고 이지를 흉내 낸다는 것을 배운다. 꿈들로부터 당신은 또한 인간의 마음도 물질도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습이 아니라는 것과, 불멸의 마음은 물질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마음의 과학이 깨달아 질 때, 심령론이 어떤 과학적 근거나 근원도 없고, 인간의 증언 외에는 어떤 증거도 권능도 없는, 대부분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육신적 감각들의 산물(産物)이다. 영에는 관능성이란 없다. 나는 절대로 심령론을 믿을 수 없었다.
심령론의 기반과 구성은 다 같이 물질적이고 육신적이다. 그것의 영들은 무수한 육체성들로서, 기질과 특성에서 제한되어 있고 유한하다. 그러므로 심령론은 언제나 무한한 영이 육신적 존재, 즉 하나의 유한한 형상이라는 것 -크리스천 사이언스에 반대되는 이론- 을 전제로 한다.
<72:1>
단지 하나만의 영적 존재가 있다, - 그것의 생명은 육신적 감각이 인지할 수 없다. 사람의 신성의 원리는 불멸의 감각을 통하여 말한다. 만일 필멸의 몸 -다른 말로 필멸적, 즉 물질적 감각- 이 영으로 가득 차있다면, 필멸의 감각에게는 그 몸이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될 것이다, 즉 그 몸은 죽음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영과의 교감에 선행하는 조건은 영적 생명의 획득이다.
소위 영들은 육신적인 의사전달자에 불과할 뿐이다. 마치 빛이 어두움을 파괴하고 어두움이 있던 자리에 모든 것이 빛이듯이, (절대적 과학 안에서) 혼,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주는 유일한 존재이다. 진리가 필멸성을 파괴하고 불멸성을 밝혀준다. 필멸의 믿음 (생명에 대한 물질적 관념)과 불멸의 진리 (영적인 관념)는 가라지와 밀인데, 그것들은 진전함에 따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다.
완전함은 불완전함을 통해 표현되지 않는다. 영은, 영의 반대인, 물질을 통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오류는 그것을 통하여 진리가 걸러내질 수 있는 편리한 체가 아니다.
<72:21>
하나님, 즉 선하심이 어디에든 계시므로, 신성의 논리에서는 선에 대한 가상적 반대인 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오게 된다. 과학에서, 하나님, 즉 무한한 일체의 일체로부터 파생된 개별적인 선은 망자(亡者)로부터 인간들에게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은 전달될 수도 없고 과학적도 아니다. 죄를 짓는 지상의 필멸의 존재는 생명의 실제도 아니고 그것을 통해 지상으로 진리가 전달되는 매체도 아니다. 악과 고통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일 때, 교류의 즐거움은 죄의 우스개 거리가 되고 만다. 개인적 상호교통이 아닌 신성의 법이 진리와 건강과 조화의 세상과 인류에 대한 전달자이다. 불과 서리를 쉽사리 섞을 수 없듯이, 당신은 영과 물질을 섞을 수 없다. 양자 모든 경우에서, 하나는 다른 하나를 지원하지 않는다.
<73:3>
심령론에서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개인을 물질이라 하고, 오늘 죄인으로 죽어서 내일 지상으로 돌아 올 것으로 가상하는 다른 한 사람을 심령이라 부른다. 둘 가운데 어느 한 쪽도 무한한 영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면 영이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그 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영으로서의 한 사람이 물질로서의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개체성과 사람에 대한 과학 둘 모두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왜냐면 사람은 영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제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일한 영이시다. 그 밖의 어떠한 통제나 소위 영이라고 하는 것의 끌어당기는 힘은 하나의 필멸의 믿음이며, 그것은 그것의 결과, 즉 악의 반복에 의해 알려지게 되어 있다.
만일 영, 즉 하나님이 전기 또는 다른 형태의 물질을 통해 필멸의 존재들과 교통하신다거나 그들을 조종하신다면, 신성의 질서와 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영의 과학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물질적 육신들이 먼지로 돌아갔다가, 그 후에 물질적 감각들과 욕망들을 가진 영적 육신들로 일어난다는 믿음은 부정확한 것이다. 영이 어떤 한정되고 물질적인 육신에 갇혀 있다가, 사망으로 인해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믿음과, 그것이 물질적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영이 그 육신에 속한 감각을 유지한다는 믿음도 마찬가지로 부정확한 것이다.
<73:26>
물질이 이지를 가진 존재의 실재성의 어느 한 부분이라고 가정한다거나 영과 물질, 이지와 비이지가 서로 교통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이다. 이 오류를 과학이 파괴할 것이다. 관능적인 것이 영적인 것의 대변자가 되어질 수도 없고, 한정적인 것이 무한한 것의 통로가 될 수도 없다. 소위 물질적 존재와 사망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영적 생명 사이의 교류란 없다.
<74:3>
영과 교류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유기적 신체들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이 물질적 상태를 한 번 떠난 뒤에 다시 그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마치 토양 위로 자라나온 싹 안으로 이미 흡수되어진 도토리를 원상태로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싹이 튼 씨앗은 존재의 새로운 형태와 상태를 가진다. 이생이나 저승에서 물질 안의 생명에 대한 믿음이 소멸될 때, 그 믿음을 유지해오던 오류는 그 믿음과 함께 사라지게 되며, 다시는 옛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죽어서 물질적 육신을 떠났다고 하는 믿음과 아직도 유기적, 물질적 육신 안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과 같은 서로 반대되는 꿈을 꾸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통신이나 교류도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아름다운 곤충으로 변환된 애벌레는 더 이상 벌레도 아니며, 곤충이 벌레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나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서 돌아가지도 않는다. 그러한 거꾸로 가는 변환은 과학에서 불가능하다. 어둠과 빛, 젖먹이와 어른, 질병과 건강은 서로 반대들, - 즉 다른 믿음들로서 결코 섞이지 않는다. 젖먹이가 어른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고, 어둠이 빛을 표현할 수 있다고, 우리가 지구의 반대편에 있을 때 우리가 유럽에 있는 것이라고, 누가 말 할 수 있겠는가? 영적, 즉 비 육신적 상태와 물리적, 즉 신체적 상태 같이 서로 반대되는 상태들을 분리하는 심연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없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는 어떠한 퇴보도, 즉 이미 성장하여 벗어난 상태로 되돌아감은 절대로 없다. 소위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은 교류할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은 생존, 즉 의식상 서로 분리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75:1>
이 단순한 진리가 사람이 물질로서 죽지만 영으로서 생명으로 온다는 잘못된 가정을 드러낸다. 소위 죽은 사람은, 아직 육체적 감각들에 의해 인지되는 존재 상태 안에 있는 자들에게 다시 나타나기 위해서는, 만져 볼 수 있어야 하고 물질적 이어야 할 필요, -물질로 옷 입혀져 있어야 할 필요, - 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 감각들은 소위 죽은 사람을 인지할 수 없을 것이다.
심령론은 인간들을 존재에 대한 영적 의미로부터 다시 그것의 물질적 의미로 변환시키고자 한다. 이 무지한 물질주의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면 무한한 영에게는 어떠한 물질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결코 죽은 적이 없었다는 깨달음으로 그를 되살리셨을 뿐, 그의 육신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되살리신 것은 아니었다. 만약 예수님이 나사로가 그의 육신 안에서 살았다거나 죽었다고 믿으셨다면, 주님은 그 육신을 매장했던 사람들과 동일한 믿음의 수준에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를 소생시키시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깨워낼 수 있을 때에, 당신은 그때야 자기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임재를 재현시키는 예수님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는 안 된다.
<75:25>
이승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류 교류할 수 있는 한 번의 가능한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변화전의 순간, - 즉 그들의 서로 반대되는 믿음들을 이어주는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이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의 꿈으로부터 다른 꿈으로 통과하는 현관 안에서, 즉 우리가 지상에서의 잠으로부터 생명의 위대한 진리들로 깨어날 때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전에 갔던 사람들의 반가운 환영 인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들은,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는 사람이 그 놀라움에 눈을 크게 뜨고 그것 밖에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황홀함으로 크게 숨쉬는 것처럼, 이러한 환상을 속삭일 수도, 그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과 그들을 손짓으로 부르는 이의 이름을 말할 지도 모른다.
<76:6>
존재가 깨달아지게 되면, 생명은 물질적이지도 유한하지도 않은, 무한한 것으로, -즉 보편적 선(善)인 하나님으로 인지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이나 마음이 한 순간이라도 유한한 형상 안에 있다거나, 선이 악 안에 있다는 믿음은 파괴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이 물질 안으로 들어간 적이 절대 없고 따라서 절대로 물질로부터 되살려지지도 않았음이 깨달아 질 것이다. 사람이 영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에까지 진전되었을 때, 사람은 더 이상 물질과 함께 교통할 수 없다; 마치 나무가 그것의 씨앗으로 되돌아 갈 수 없듯이 사람도 다시 물질로 돌아 갈 수가 없다. 사람은 육신적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는 신성의 영에 의해 물질이 아닌 아이디어로서 특징지어지는 개별적인 의식(意識)이 될 것이다.
고통 받고, 죄짓고, 죽어 간다는 믿음들은 실제가 아니다. 신성의 과학이 보편적으로 깨달아질 때, 그것들은 사람에 대해 아무런 권능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면 사람은 불멸이며 신성의 권위에 의해 살기 때문이다.
죄가 없는 즐거움이, - 즉 한 점의 육신적 쾌락이나 고통도 없이 무한한 신성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가진, 생명의 완전한 조화와 불멸성이 - 유일하게 참되고 파괴될 수 없는 사람을 이루는데, 그러한 사람의 존재는 영적이다. 존재의 이러한 상태는 과학적이며 온전하다, - 즉 신성의 과학 안에서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깨달은 사람에게만 분별될 수 있는 완전함이다. 사망이 결코 존재의 이러한 상태를 재촉할 수 없다, 왜냐면 불멸성이 드러나기 전에, 사망은 그것에 굴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어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6:32>
영과 무한함에 대한 인식은 이승이나 저승에서 갑작스레 오지 않는다. 신앙심이 깊었던 폴리캅은, “나는 선으로부터 악으로 순식간에 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필멸적인 존재들 역시 오류로부터 진리로의 변화를 단 한번에 성취하지 못한다.
<77:5>
존재의 과학에 도달할 때까지는 존재는 육신적 감각의 하나의 믿음이기를 계속한다. 오류는 이승과 저승 모두에서 스스로의 파멸을 가져온다, 왜냐면 필멸의 마음이 그 자신의 신체적 상황들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영적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는, 존재의 다음 단계에서도 현 단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망이 발생할 것이다. 그 때에야, “둘째 사망에 권세가 없다.”는 것이 실증될 것이며 그전에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자신의 소위 쾌락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는 물질적 생명의 이러한 꿈이 의식으로부터 사라지기까지에 요구되는 기간은 “아무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이 아신다.” 이 기간은 오류의 끈질김에 따라 더 길거나 더 짧은 동안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또는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물질적 상태를 연장시키고 따라서 생기가 없는 혼이나 죄짓고 고통 받는 감각, -즉 물질에 구속된 소위 마음에 대한 환상을 연장시키는 것이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만약 영들로부터 인간의 의식에로의 의사전달이 가능하다 해도, 그러한 의사전달은 존재의 진보되어가는 매 단계마다 아름답게 점점 감소해 간다. 죽은 사람은 점차적으로 무지와 물질성을 초월해 나가고, 심령논자들은 물질적 심령론에 대한 믿음을 탈피해 나갈 것이다. 강신술은 소위 망자를 시든 꽃 봉우리와 같은 상태에, 즉 비참한 연옥에 맡기는데, 거기에서는 망자들의 개선될 수 있는 기회가 무(無)에 가깝게 좁아져서 그들은 자신들의 옛적의 물질적 관점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78:1>
시들어 가는 꽃, 말라비틀어지는 싹, 마디 진 참나무, 사나운 야수는, - 질병과 죄와 사망이라는 부조화처럼-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들은 감각의 거짓, 즉 필멸적 마음의 변화하는 빗나감들이다; 그것들은 마음의 영원한 현실들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써서 낡아지게 하고 죽음을 재촉한다는 믿음,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불멸성과 교류하고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비논리적인가! 만일 죽은 사람이 필멸성, 즉 물질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영적이 아니고, 아직도 필멸적이며 죄를 범하고 있고, 고통을 받고 있으며, 죽어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만일 교통이 가능하다해도, 왜 불멸성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그들에게 구하고, 그들을 신탁(神託)을 전하는 자들로 받아들이는가? 무지로부터 모아들인 정보는 해로운 경향이 있다.
심령론은 그것의 물질적 부수물들과 함께 영의 지고성을 파괴하고자 한다. 만일 영이 모든 공간에 충만해있다면, 그것은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어떤 물질적 방법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은 무소부재하기 위해서 어떤 전선(電線)도 전기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은 물질적으로 만져질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물질적인 효과인 전기를 통해 사람과 교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영의 위엄과 전능성이 실종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물질이 물질을 돌보고, 강신술이 많은 신들을 만들어내고, 최면술과 전기가 하나님 정부의 요원들이라고 주장되는 뒤범벅인 곳에 계시지 않는다.
영은 사람을 축복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에 의해 병든 이들이 고침을 받고, 슬퍼하는 이들이 위로를 받으며, 죄인들이 개심한다. 이것들이 영원한 과학 안에 거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신 유일 보편적인 하나님의 효과들이다.
<79:1>
질병에 대한 묘사, -즉 그것의 증상과 부위와 치사성(致死性) -는 과학적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사망에 대해 경고를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생명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을 공포로 죽음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죽음에 대한 환자의 생각들을 바꿈으로써 회복된 건강에 대한 수많은 사례들을 들 수 있다.
과학적인 심적(心的) 방법이 약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며, 그러한 심적 방법은 영구한 건강 상태를 만든다. 과학이 전 영역을 세밀히 점검하고, 오류가 심어놓은 모든 씨앗을 파내버려야만 한다. 심령론은 인간적인 믿음들과 가정들에 의존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하나님께 대한 더욱 고차원적인 깨달음을 통해 이런 믿음들과 가정들을 제거한다, 왜냐면 물질적 인격들이 아닌 신성의 원리에 기반을 둔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불멸성에 대한 그것의 계시를 통하여, 존재에 대한 조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악한 영들, 즉 잘못된 믿음들을 내쫓으셨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마음을 가지라고 청하였다. 예수님은 유일한 영에 의해 자신의 일을 행하셨다. 그는 말씀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그는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한에서는 한번도 질병을 묘사하지 않으셨지만, 질병을 고치셨다.
과학적이 아닌 실천사는 말하기를, “당신은 아픕니다. 당신의 두뇌는 과로하였으니 휴식을 취해야만 합니다. 당신의 신체는 쇠약하니 강화되어야만 합니다. 당신은 신경쇠약을 앓고 있으니 그것은 치료를 받아야만 합니다.”고 한다. 과학은, 이지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마음이 육신과 두뇌를 다스린다는 것을 주장하며, 이 모든 것에 반대한다.
<79:29>
마음의 과학은 인간들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선을 행하는 중에 피로를 풀어준다. 우리의 창조주를 섬김에 있어서 주는 행위는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지 않는다, 또한 움켜쥐고 있는 것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정도에 비례하여 우리는 힘을 가지며, 우리의 힘은 진리를 입 밖에 내어 말함으로써 줄어들지도 않는다. 한 잔의 커피나 차는, 설교의 영감을 위해서나 신체적 지구력을 받쳐주는데 있어, 진리와 대등하지 않다.
<80:6>
고인(故人)이 된 테오도어 파커의 이야기라고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불멸의 영이란 과거에도 결코 없었고, 미래에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게재하고 있는 바로 그 정기간행물이 심령의 교류가 불멸성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증거라는 주장을 매주일 반복하고 있다.
나는 많은 심령논자들의 인류애나 박애(博愛)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견해가 같을 수 없다. 심령론에 힘을 주는 것은 신비주의이다. 과학이 신비를 쫓아내고 특별한 현상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과학은 절대로 현상을 이성(理性)의 범주로부터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옮기지 않는다.
우리가 식탁과 손 양자 모두를 움직이는 것이 마음의 힘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때, 손의 도움이 없이 마음이 식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게 보여서는 안 된다. 플랑세트 - 몇 년 전 많은 사람들의 즐겁게 했던 프랑스 장난감- 까지도 소위 물질이라고 하는 필멸의 마음의 토대에 대한 필멸의 마음의 지배를 입증해주었다.
필멸의 마음의 토대인 물질을 진동시키는 것은 필멸의 마음이다. 이런 움직임들은 인간적 믿음의 의지의 작용으로부터 생기지만, 그것들은 과학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식탁을 차림이 분명히 그러는 것처럼, 식탁을 요동시키는 것도 필멸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며, 필멸의 마음은 이런 놀라운 일이 영들과 전기로부터 나온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마음과 물질이 가시적 그리고 비가시적으로 협력하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물질이 이지적이라는 일반적인 확신 위에 기본을 두고 있다.
<81:1>
소위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상호 교류를 증명하는 증거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환자에게 물질이 고통을 받고 있고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그러나 이 후자의 증거는 마음의 과학에 의해 파괴된다. 만일 심령론자가 존재의 과학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영매(靈媒)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잘해 봐야 그것의 이론상, 최심령론은 어떤 개인들이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존재를 가져왔고 필멸의 육신과 그들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어떤 확실성도 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의 자기가 불멸이라고 하는 주장은, 그것과 반대인 주장, 즉 그가 필멸이라는 주장이 불멸성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가 불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심령이라고 하는 것들이 불멸성을 가르칠 때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생명, 사랑, 진리가 불멸성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
과학에서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모양으로서의 사람은 불멸일 수밖에 없다. 풀이 말라가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들은 다시 나타난다. 수를 나타내는 숫자를 지워보라, 음악의 음을 침묵시켜보라, 사람이라고 부르는 육신을 벌레들에게 주어보라, 그럼에도 생산하고 다스리는 신성의 원리는, -숫자들이나 음악의 경우와 정확하게 같이 사람의 경우에서도- 사람을 필멸의 존재라고 정의하는 소위 물질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 물질적 감각의 결과로서 나온 부조화가 과학의 조화를 감추지만, 부조화는 과학의 신성의 원리를 파괴할 수 없다. 과학에서 사람의 불멸성은 선이신 하나님의 불멸성에 의존하며, 선의 불멸성의 필연적 귀결로서 따라 나온다.
<81:31>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전달자라고 추정되는 죽은 사람을 알았었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생각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는 이곳에 없는 친구에 대해서 마치 이곳에 있는 친구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곳에 없는 마음을 읽는 것은 이곳에 있는 것을 읽는 것보다 더 어렵지는 않다. 쵸서는 수 세기 전에 작품을 썼지만, 우리는 그가 썼던 운문 안에 있는 그의 생각을 아직도 읽는다. 고전 연구란 그들이 개인적으로 존재했는지 우리가 의심해볼 수도 있는 호머와 버질의 마음들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82:9>
만일 영적 생명이 죽은 사람들에 의해 획득되었다면, 그들은 물질적 존재로 돌아올 수 없다, 왜냐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의식 상태들이 개입되고 있으며,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의식 상태들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면 중 우리는 우리의 옆에 있는 꿈을 꾸는 사람과 그와의 근접함에도 불구하고 교통할 수 없다, 왜냐면 우리 둘 다 무의식 가운데 있든지 꿈 안에서 의식의 서로 다른 미로를 헤매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모양으로, 만일 우리의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고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변화 전의 생존상태를 의식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의식 상태는 우리의 상태와는 다를 것이라는 것이 따라 나온다. 우리가 그들의 상태 안에 있지도 않고, 그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심적 영역 안에 있지도 않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교류는 이 서로 다름에 의해 막힌다. 심적 상태가 너무 달라, 상호간의 교류는 마치 두더지와 사람 사이에서 불가능한 것처럼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꿈들과 서로 다르게 깨어남이 다른 의식을 나타낸다. 오스트랄리아를 방랑할 때, 눈으로 만든 집에 사는 에스키모의 도움을 구하겠는가?
<82:31>
죄와 관능성이 더 큰 권능을 발휘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지 아니면 신성의 마음인지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여호와의 예언자들이 했던 것을 바알의 숭배자들은 하는데 실패했다; 그런데도 술책과 속임 수가 그들이 그 지혜의 역사(役事)를 동등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83:6>
과학만이 이제 표면으로 나오고 있는 놀라운 선과 악의 요소들을 설명할 수 있다. 인간들은 이런 말세의 오류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진리 안에서 피난처를 찾아야만 한다. 깨달음이 없는 맹목적 믿음만큼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적대되는 것은 없다, 왜냐면 그런 믿음이 진리를 가리고 오류 위에 건축해 나가기 때문이다.
기적들이란 과학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과학은 일반적인 종교들과 의견이 다르다. 권능의 과학적인 나타남은 신성의 특성으로부터 근원한 것이며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면 과학은 자연을 해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가 일반적으로 물질적 법들로 다스려지지만, 때로 영이 이런 법들을 제쳐 놓는다는 것, - 이 믿음이 전능한 지혜를 하찮게 여겨지도록 하며, 물질에게 영보다 상위(上位)의 자리를 내준다.
<83:21>
생명이 물질적이거나 유기적으로 영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반대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와 모든 형식의 미신들 사이에는 굉장한 심연이 놓여있고 마치 부자와 거지 라자루스 사이에 있는 심연처럼 건널 수 없다. 세상에는 인간의 마음에 의한 독심술과 불멸의 마음에 의한 독심술이 있다. 후자의 것은 영적 깨달음을 통해 신성의 목적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것에 의해 사람은 신성의 원리와 모든 사물들에 대한 설명을 획득한다. 인간적 마음에 의한 독심술과 불멸의 마음에 의한 독심술은 확실하게 반대되는 입장들이며, 그로부터 원인과 결과가 해석된다. 인간의 마음을 읽는 행위는 단지 인간적 믿음들만을 조사하고 취급한다. 과학은 불멸이며, 필멸의 믿음들의 전제와도 결론과도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84:3>
고대의 예언자들은 영적, 비육신적 관점으로부터 그들의 선견지명을 얻었고, 악을 예시(豫示)하고 사실과 허구를 혼동함에 의해, -즉 육체적 상태와 인간적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를 예언함 의해 얻은 것이 아니었다. 존재에 관한 진리와 조화를 이룰 만큼 과학 안에서 충분하게 진보하였을 때, 무의식간에 사람들은 귀신들이나, 영들이나, 신인(神人)들이 아닌 유일한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선지자들도 되고 예언자들도 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안다는 것은 상존하는 신성의 마음의 특권이며, 이 마음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생각의 특권이다.
존재에 관한 과학을 잘 알게 됨이 우리로 하여금 신성의 마음과 더욱 충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고, 우주적 복지와 관련된 일들을 내다보고 예언할 수 있게 되도록, 즉 신성으로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 참으로, 속박되지 않는 마음의 지경에 이를 수 있도록 만든다.
마음이 무한하다는 것, 즉 육체성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고, 듣고 보는데 있어서 귀와 눈에 의존하지 않고, 움직이기 위해 근육과 뼈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음이, 마음의 과학을 향해 나가는 한 걸음인데 그 과학으로 우리가 사람의 본성과 존재를 분별한다. 이 존재에 관한 참된 개념이 심령론에 대한 믿음을 바로 그것의 발단(發端)에서 파괴한다. 왜냐면 영들이라고 불리는 물질적 인격들의 양보가 없이는, 심령론은 그 위에 구축할 어떤 기초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84:28>
우리가 영에 관해 올바르게 아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즉 신성의 원리로부터 오며, 그리스도와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통해 배워진다. 만일 이 과학을 철저히 배우고 적절하게 소화한다면, 우리는 천문학자들이 별자리를 읽을 수 있거나 일식을 계산해낼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정확하게 진리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마음 읽기는 천리안과는 반대이다. 그것은 물질적 감각이 아닌 혼의 역량을 실증하는 영적 깨달음을 밝혀줌이다. 인간의 마음이 신성의 마음에 굴복할 때 이러한 혼의 감각이 인간의 마음에 찾아온다.
<85:7>
그러한 직관들이 조화를 이루고 영존시키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사람으로 하여금 악이 아닌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당신은 당신이 이런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당신이 파괴하고자 하는 오류를 분별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치유의 완전한 과학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사마리아의 여인은 말하기를: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한 번 여행하면서, “저희 생각을 아셨다,” - 즉 그들의 생각들을 과학적으로 읽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그는 질병을 분별하고 환자들을 고쳤다. 동일한 방법에 따라, 중요한 순간의 일들이 히브리인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우리의 주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실 때 이런 권능의 결여를 꾸짖으셨던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예민한 육체적 감각을 가졌을 수 있지만, 인간들은 영적 감각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세대가 영적인 것 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며, 사악하고 불순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의 물질주의에 대한 공격은 매우 날카로운 것이었지만,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한 번도 위선에 대해 가장 엄중한 비난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는 말씀하기를: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 위대한 스승께서는 원인과 결과를 모두 아셨으며, 진리가 스스로를 전달하지만 결코 오류를 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셨다.
<86:1>
예수님은 언젠가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으셨다. 이 물음을 물리적 접촉 만에 의해 나온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의 제자들은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접촉함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었음을 아셨다. 그의 물음을 반복함으로써, 그는 아픈 여인의 신앙으로부터의 대답을 들었다. 그의 이 심적 부름에 대한 신속한 파악이 그의 영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제자들의 그것에 대한 오해는 그들의 물질성을 드러냈다.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더 영적인 감수성을 가지셨다. 반대되는 것들은 반대되는 방향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다른 결과들을 만
필멸의 존재들은 생각의 영상들을 전개한다. 이런 것들이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유령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들의 영향은 언제나 느낄 수 있지만 단지 그것들을 본다는 것이 예외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비롭다. 유령이 나오는 집들, 유령 같은 목소리들, 이상한 소음들, 그리고 어두운 강신술 회합으로 불려나온 유령들은 협잡꾼들에 의한 묘기와 연루된 것이거나 그것들은 필멸의 마음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전개되는 영상이나 소리들이다. 본다는 것은 느끼는 것에 못지않게 물리적 감각의 성질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느낀다는 것보다 그것을 본다는 것이 왜 더 어려운 것인가? 교육만이 그 차이를 결정한다. 실제에 있어 차이란 없다.
<86:25>
초상화, 풍경화, 서법(書法)의 모사, 표현의 특이성, 회상되는 문장들 모두가, 감각들에 의해 인지될 수 있는 대상물들로부터 취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쉽사리 그림같이 생생한 생각과 기억으로부터 취해질 수 있다. 필멸의 마음은 그것이 보는 것을 믿는 것과 똑 같이 그것이 믿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것 자신의 생각들을 느끼고 듣고 본다. 그림들은 화가가 그것들을 화폭에 담을 수 있기 전에 심적으로 형성된다. 독심술사들은 생각의 이런 그림들을 지각(知覺)한다. 그것 안에서 그것들이 발견될 수 있는 마음의 기억에게는 잊혀진 경우까지도, 그들은 그것들을 복사하고 재생한다.
<87:5>
옮겨서 베껴진 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생각이나 사람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개인들은 세상을 떠났을지라도, 그들의 정신적 환경은 인지되어 묘사되고 전달될 수 있도록 잔존한다. 신체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그들의 관계가 망각된다 해도, 그들의 관계는 인간의 마음의 전반적 분위기 안에서 부유한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런 환영(幻影)을 “제2 시각(視覺)”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필멸의 마음에게 본래의 사실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실은 그것은 제2가 아니라 제1의 시각이다. 과학이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지만,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것처럼 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통하여 치유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최면술사가 하는 것처럼 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광산은 그것의 바위들 속에 있는 에메랄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바다는 그것의 동굴 안에 있는 보석들이나, 산호들이나, 날카로운 암초들이나, 그것의 한가운데 떠 있는 커다란 범선들이나 그것의 모래에 묻혀있는 사체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그곳에 있다. 당신이 어떤 심적 개념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져버렸다고 가정하지 말라. 참된 개념은 절대로 실종되지 않는다. 우정이나 어떤 강력한 느낌에 의해 필멸의 마음에 생성된 강한 인상들은 영속한다, 그리고 독심술사들은 이런 인상들을 지각하고 재현할 수 있다.
<87:29>
기억은 오래전에 잠잠해진 목소리들을 재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눈을 감기만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 앞에 형상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수천 마일 밖에 있던지 물리적 시각이나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꿈을 꾸는 수면 중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백일몽 가운데서 시인 테니슨이 묘사하였던 심정의 갈망, -즉
사라져 버린 손의 감촉
그리고 조용해져버린 목소리의 소리
을 상기(想起)할 수 있다. 마음은, 어떤 진미(珍味)도 미각을 건들이지 않고 어떤 냄새도 콧구멍을 거치지 않을 때에도, 당장의 맛과 냄새까지도 인식할 수도 있다.
<88:9>
참된 아이디어들이 허상으로부터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각각의 근원을 앎으로써 구별할 수 있다. 아이디어들은 신성의 마음으로부터 발산되는 것들이다. 뇌와 물질로부터 나오는, 생각들은 필멸의 마음의 파생물들이다; 그것들은 필멸의 물질적인 믿음들이다. 아이디어들은 영적이고 조화로우며 영원하다. 믿음들은 소위 물질적 감각들로부터 나오는데, 그것들은 한 때는 본질적 물질이라고 가정되고 또 다른 때에는 영들이라고 불린다.
자신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성의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디어는 육신적 감각들을 통해서는 보일 수도 느껴질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존경심이나 종교적 신앙과 관련된 기관(器官)을 자극해보라, 그러면 개개의 인간은 심오한 흠모하는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와 반대되는 것을 자극해보라, 그러면 그는 모독하는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효과들은 그리스도적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영적인 현상도 아니다, 왜냐면 둘 모두 필멸의 믿음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88:26>
감동적인 말은 진리와 사랑의 가락을 반향하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학식보다는 영감에 의한 것이다. 비록 그것의 재능이 책으로부터 얻어진 선물 또는 세상을 떠난 영들의 충동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말해지지만, 그것은 신성의 마음으로부터 도출된 가능성들을 보여준다. 감동적인 말이 세상을 떠난 어떤 영이 말하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나올 때, 도움을 받지 않는 영매는 알 능력도 말할 능력도 없는 것을 누가 말 할 수 있겠는가? 이 현상은 필멸의 마음의 믿음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다른 마음이 자신을 통해 말하고 있다는 믿음 안에서 그녀의 무지함을 잊어버리고, 열광적 추종자는 이례적으로 청중을 감동시키게 될 수도 있다. 그 녀 자신에 대해서보다 남들에 대해 더 큰 믿음을 가지고,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혀와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녀는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89:9>
외부의 도움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파괴해보라, 그러면 그녀의 감동적인 말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전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믿음에 대한 한계가 돌아온다. 그녀는, “나는 감정을 북받치게 하는 말을 할 능력이 없다, 왜냐면 나는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이런 친숙한 사례가 사람에 관한 성경의 말씀,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그도 그러하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공부함이 없이 또는 부가적인 조건이 없이는 그가 웅변가가 될 수 없다고 믿는다면, 육신은 이 믿음에 반응을 보이고, 전까지 달변이었던 혀는 잠잠해지고 만다.
마음은 반드시 교육의 과정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안에 모든 아름다움과 시, 그리고 그것들을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감각들이 조용할 때, 영, 즉 하나님을 들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혼의 영향이나 행동은 자유를 주는데, 그것이 즉흥적인 현상이나 배우지 않은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열변을 설명해 준다.
물질은 이지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다. 나무는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다. 소리는 음악의 창시자가 아니고, 사람은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다. 카인은 만일 생명이 육신 안에 있고 사람이 그것을 준 것이라면, 사람이 그것을 빼앗아 가버릴 권리가 있는 것이라고 매우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 사건이 물질 안에 생명이 있다는 믿음이 “태초부터 살인자”였음을 보여준다.
<89:32>
만일 밀을 생산하기 위해 종자가 필요하고, 밀가루를 만들기 위해 밀이 필요하다면, 또는 만일 하나의 동물이 다른 동물을 발원시킬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의 근본적인 근원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갈리리의 해안에서 빵 덩어리들과 물고기들이 불어났었겠는가, -즉, 또한 빵이나 물고기가 나올 수 있는 가루나 단세포 생물이 없이 어떻게 그랬겠는가?
<90:6>
지구의 궤도와 적도라고 부르는 상상의 선은 실체가 아니다. 지구의 움직임과 위치는 오직 마음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당신 자신으로부터 물질 안에 본질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없애도록 하라, 그러면 지금 필멸의 마음에게 가능한 움직임과 변화가 육신에게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그러면 존재는 영적인 것으로 인식될 것이며, 비록 지금 어떤 사람들은 사망이 불멸성을 향한 필요한 준비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사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유럽으로 날아가고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을 만난다. 구경꾼은 침대에 있는 육신을 보지만, 그 육신의 추정상의 거주자가 그것을 하늘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 운반해간다. 이것이 생각의 가능성들을 보여준다. 아편과 해시시를 복용하는 사람은 심적으로 원거리를 여행하고 경이로운 일들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의 육신들은 한 장소에 머물러 있다. 이것이 필멸의 정신상태와 지식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수용함이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아이디어를 터득하도록 자유롭게 해준다. 이러한 신념이 죽음으로 가는 문을 닫고 불멸을 향한 문을 활짝 열어준다. 영을 깨달음과 인식함이 결국 반드시 올 것이며, 우리는 신성의 원리를 이해함으로 존재의 신비를 해결하는데 우리의 시간을 활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반영할 때는 분명히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91:1>
계시록의 기자는 우리에게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러분은 지고한 지혜의 통치 하에 있는 존재들이 살고 있는 이러한 하늘과 땅을 그려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자, 그리고 오직 신성의 원리와 생명과 사랑만을 복종하자. 여기에 모든 참된 영적 성장을 향한 출발점이 있다
죄인이 신성의 과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과학이 그의 존재하지 않음을 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류가 그것의 원천적인 존재하지 않음으로 빨리 격하될수록 사람의 위대한 실재성이 들어나고 그의 진정한 존재가 이해될 것이다. 오류의 파괴가 결코 진리나 생명의 파괴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을 인지함이다.
물질적 자아에 몰두하여 우리는 생명 즉 마음의 본질을 희미하게만 분별하고 반영한다. 물질적 자아를 부인함이 사람의 영적이고 영원한 개성을 분별하는 것을 돕는다, 그리고 물질로부터 또는 물질적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통하여 얻어진 잘못 된 지식을 파괴한다.
영적 사실들을 좀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 여기에서 몇 가지의 잘못된 가정들을 고려해 봐야만 한다.
믿음의 첫 번째 잘못된 가정은, 본질과 생명과 이지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잘못된 가정은, 사람이 정신적이기도 하고 물질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잘못된 가정은, 마음이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실제의 마음은 악할 수도 없고 악의 매체일 수도 없다. 왜냐면 마음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91:32>
네 번째 잘못된 가정은, 물질이 이지적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일부인 물질적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92:3>
다섯 번째 잘못된 가정은, 물질이 자신 안에 생명과 사망의 문제점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즉 물질이 쾌락과 고통을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감각들을 전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가정 안에 내포된 허상으로부터 사망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필멸의 육신의 분해과정이 일어난다.
마음은 현재와 영원에 있어서 죄를 범하는 권능을 두개골 안에 가진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옛날의 성경에 나오는 그림에서 우리는 선악과를 맺는 나무를 감고서 아담과 이브에게 말을 하고 있는 뱀을 본다. 이것이 우리의 처음 부모에게, 선과 악에 대한 지식, 즉 영으로부터 얻어진 대신 물질 즉 악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을 추천하는 행위 중에 있는 뱀을 나타낸다. 그 묘사는 아직도 사실적으로 정확하다, 왜냐면 필멸적인 인간, - 하나님의 사람의 풍자-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은 인간의 지식으로부터 또는 관능성으로부터 나온 결과 , 즉 물질적 감각의 단순한 파생이기 때문이다.
오류를 폭로하라, 그리하면 그것은 당신에게 거짓말을 쏟아낼 것이다. 오류에 관한 사실, - 즉 그것의 존재하지 않음- 이 드러날 때까지, 윤리적 요구는 만족되지 않을 것이며, 오류를 존재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능력이 결여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잘못에 불과한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만 한다. 악의 토대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무엇에 대한 믿음의 위에 있다. 이 믿음은 진리만의 주장들을 촉구하는 대신에 두 개의 상반된 권능들을 지지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오류는 단지 진리의 부재일뿐인데도 오류가 실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이 오류의 우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한다.
<92:32>
당신은 혼이 본질적이고 육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는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기억하라, 그는 거의 19세기 전에 영의 권능을 실증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라고 하셨으며, 또한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고도 하셨다. “보라, 지금이 기뻐 받아들여진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93:10>
신성의 논리와 계시는 일치한다. 만일 우리가 다르게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논리가 잘 못이든지 아니면 우리가 계시를 잘 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선은 절대로 악의 원인이 될 수 없고, 악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선은 악의 원인을 야기 시킬 수 있는 마음을 창조하지 않는다, 왜냐면 악은 그것에 반대하는 오류이고 창조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파괴적인 전기(電氣)는 무한한 선의 소생이 아니다. 신성의 존재의 진짜 본성과 모순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록 인간적 신앙이 그것에 천사의 옷을 입혀놓을지 몰라도, 근거가 없는 것이다.
영이 무한하기도 하고 동시에 유한하기도 하다는 믿음이 역사 전체를 어둡게 만들어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고유명사로서의 영은 지고한 존재의 이름이다. 그것은 양과 질을 의미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된다. 영이란 단어의 변형된 파생어들은 성질에만 유의하도록 할 뿐 하나님께는 아니다. 사람은 영적이다. 그는 영이신 하나님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 영이라면, 그렇다면 사람들은 영들이요, 신들일 것이다. 유한한 영은 필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 안에 포함될 수 있다는 믿음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이다. 이 믿음이 하늘의 왕국과 존재의 과학 안에서의 조화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94:1>
예수님은 유일한 영이신 유일한 하나님을 가르치셨는데, 그분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즉 물질이 아닌 영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드신다. 사람은 무한한 진리, 생명, 그리고 사랑을 반영한다. 그렇듯 이해되어진 사람의 본성은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바와 같은 “형상”과 “모습”이라는 말들이 뜻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인격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계에 대한 참으로 그리스도적이고 과학적인 진술이, 그것을 동반하는 실증과 함께, 랍비들을 격분시켰으며, 그들은 말하기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고 했다.
동방의 제국들과 나라들은 그곳에 널리 퍼졌든 신격(神格)에 대한 틀린 생각으로 인해 그들의 잘못된 정치 체제를 가졌다. 독재, 불관용, 그리고 유혈의 참사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든, 무한한 것이 필멸적인 인격과 열정과 충동의 형(型)을 따라 조성되어진다는 믿음으로부터 생긴다.
진리의 진전이 그것을 주장들을 확증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자신의 역사(役事)로써 확증하셨다. 그의 치유 권능이 관능성으로부터 일어나는 부인(否認)과 배은망덕과 배신을 불러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든 열명의 나병환자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려고 돌아왔다, -즉 자신을 고쳐준 신성의 원리에 사의(謝意)를 표했다.
<94:24>
우리의 주님은 인간의 생각들을 쉽게 읽으셨다. 이 통찰력이 그로 하여금 그런 생각들을 올바르게 더 잘 인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예민한 통찰력을 해롭게 사용했다고 암시하는 이 시대의 신앙이 없는 모독하는 사람에 대해 무슨 말을 하여야 하겠는가? 우리의 주님은 과학적 근거 위에서, 즉 마음의 무소부재함이라는 근거 위에서, 필멸의 마음을 읽으셨다. 이 분별력에 가까이 감이 영적 성장 그리고 유일한 마음의 무한한 능력과의 합일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마음-읽기로 인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실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의 효과는 언제나 치유하고 구원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인간의 마음을 읽는 유일한 진짜 과학이다. 그의 성스러운 동기들과 목표들은, 마치 오늘날 예수님이 직접 여기 계신다면 그들이 그렇게 했을 것처럼, 그 시대의 죄인들에 의해 중상모략을 당했다. 바울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이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영성(靈性), 즉 진리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신실성에 비례하여 하나님이신 생명에 다가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비례에 따라 모든 인간의 필요를 알게 되고, 병자와 죄인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분별할 수 있다. 어떠한 종류의 오류도 하나님의 법칙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
<95:19>
도덕적 교양과 선함이 이 정도에 이른 사람이면 누구든지 남을 해칠 수 없으며, 그들에게 선을 행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의, 생각을 과학적으로 분별하는 크거나 작은 능력은 그의 진정한 영성에 달려 있다. 이런 유의 독심술은 천리안이 아니지만, 치유의 성공을 위해 중요한 것이며, 그것을 위한 특별한 성질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지식의 증가와 오류의 종말을 환영한다, 왜냐면 인간의 발명에도 전성기가 있을 수밖에 없는 바, 우리는 그 날이 크리스천 사이언스에 의해, 즉 신성의 현실에 의해 이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한밤중이 새벽을 예고한다. 어두움 가운데 외로운 별에 인도되어, 옛적의 동방박사들은 진리의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다. 오늘 날의 현자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새벽을 예고하는 빛을 보고 그것의 광채를 묘사할 때, 사람들이 그를 믿어 주겠는가?
<95:28>
혼미하게 하는 허상들로 인해 잠잠해진, 이 세상은 어린 아이들의 요람에서 잠들어 있으며, 시간을 꿈으로 날려 보내고 있다. 물질적 감각은 존재에 관한 사실들을 펼쳐내지 못한다; 그러나 영적 감각은 인간의 의식을 영원한 진리로 고양시킨다. 인류는 죄를 범하는 감각으로부터 나와 영적 이해 안으로 서서히 나아간다; 모든 것들을 자발적으로 올바로 배우고자하지 않음이 그리스도교의 세계를 사슬로 묶는다.
<96:4>
사랑이 최종적으로 조화의 시간이 되었음을 나타낼 것이며, 영화(靈化)가 잇따를 것이다, 왜냐면 사랑은 영이기 때문이다. 오류가 전체적으로 파괴되기 전에 일반적인 물질적 활동에 장애들이 있을 것이다. 땅은 황량하고 황폐해질 것이나, 여름과 겨울, 즉 파종기와 수확기 (비록 변화된 형태들로서라도)는 끝까지 계속될 것이다, -즉 모든 사물들의 최종적 영화(靈化)기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가장 캄캄한 시간이 새벽에 앞서 온다.”
이 물질적인 세상은 지금에 있어서도 서로 대립되는 힘들의 시합장이 되고 있다. 한편에는 부조화와 실망이 있을 터이며; 다른 한 쪽에는 과학과 평화가 있을 것이다. 물질적 믿음들의 파탄은 기근과 역병, 결핍과 비통, 죄, 질병, 그리고 사망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은 그것들의 무존재성이 드러날 때까지는 새로운 모양으로 가장하고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혼란들은, 모든 부조화가 영적인 진리에 삼켜지고 말게 될 오류의 종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인간적 오류는 윤리적 화학작용을 통해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발효작용은 시작되었으며, 믿음의 모든 오류들이 깨달음에 굴복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믿음은 변화될 수 있는 것이지만, 영적 깨달음은 불변이다.
이런 종말이 가까워짐에 따라, 신성의 과학에 의거하여 자신의 진로를 정한 사람은 끝까지 견뎌낼 것이다. 물질적 지식이 사라지고 영적 깨달음이 증가함에 따라, 실제의 대상물들이 물질적 대신 심적(心的)으로 터득되어질 것이다.
<96:31>
이 마지막 전쟁 중, 사악한 마음들은 더 많은 악을 이루기 위한 방법들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범죄를 억제할 것이다. 그들은 악의 추방을 도울 것이다. 그들은 법과 질서를 유지할 것이며 궁극적 완전함의 확실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97:5>
실제에 있어, 오류가 진리를 한 층 더 가깝게 흉내 내면 낼수록 그리고 소위 물질이 그것의 본질, 즉 필멸의 마음을 한층 더 닮을수록, 하나의 믿음으로서의 오류가 한층 더 무력해진다. 인간의 믿음에 의하면, 번개는 위험하고 전류는 신속 하지만,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는 후자의 신속함도 전자의 타격도 무해(無害)하게 된다. 물질이 더욱 파괴적이 될수록, 그것의 무존재성이 더욱 더 드러나는데, 그것은 물질이 환상 안에서 그것의 필멸의 절정에 이르고 영원히 사라질 때까지 그렇다. 그릇된 믿음이 경계를 넘음이 없이 진리에 더욱 가까이 접근함에 따라, 그것은 파괴를 향해 더욱 무르익는데, 그 경계에서 그것은 신성의 사랑에 의해 파괴되어왔기 때문에 허상이기조차 그치게 된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 최고인 신성의 영이 모든 물질을 지배할 때까지,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원래의 존재인 영의 모양으로 발견될 때까지, 믿음이 한층 더 물질적일수록, 믿음의 오류는 더욱 더 명백해진다.
가장 넓은 범위에 미치는 사실들이 자신들에게 적대하는 대부분의 거짓들을 모은다, 왜냐면 그것들이 오류들을 숨는 곳으로부터 데려 내오기 때문이다. 진리를 말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면 진리가 목소리를 높일수록, 오류가 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를 것이며, 그것의 분명치 않은 소리가 영원히 망각 안으로 잠잠해질 때까지 그럴 것이다.
“주께서 음성을 내시니 땅이 녹았도다.” 이 성경 말씀이 모든 물질이 영의 지고성(至高性) 앞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97:29>
그리스도교는 오류를 내쫓고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도적 일을 통해 진리이신 생명과 생명이신 진리를 다시금 실증하고 있다. 현세는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새로운 발걸음에 따르는 박해에 대한 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박해받은 이들의 영적보상은 존재의 필멸의 부조화 너머로의 고양과 신성의 사랑의 선물 안에 보장되어 있다.
<98:4>
오늘날의 예언자는 심적인 지평선에서 이 시대의 표징을 본다, 즉 병자를 치유하고 오류를 파괴하는 그리스도 정신의 재현을 보는데, 그 밖의 다른 어떤 표징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육신은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과학은 물질적 시대에 잘 못 해석되고 있다, 왜냐면 그것은 물질적 감각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영들이 아닌)의 치유 권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분별될 수 있다. 신조, 교의 그리고 인간적 가설들은 크리스천 사이언스를 표현할 수 없다, 더욱 그것들은 그것을 실증할 수도 없다.
인간적 믿음들의 취약한 전제들을 뛰어 넘어, 즉 장악력이 약해지고 있는 강령들의 지배력 너머로, 그리스도적 마음-치유의 실증이, 계시되고 실용적인 과학으로 확립되어 있다. 그것은 진리와 생명과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전 시대에 걸쳐 절대적인 것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이 깨닫고 활용하도록 훼손되지 않은 채로 존속되고 있다.
여러 세기동안 -정말로, 언제나- 자연과학은 어떠한 종교의 일부로도 간주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신앙과 신심과는 전혀 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여긴다. 신비로움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을 가리고 있지 않으며, 그 가르침들은 이론적이거나 단편적이 아니고 실용적이고 온전하다; 그리고 실용적이고 온전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 본질적 활력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98:31>
그것을 통해 불멸성과 생명이 배워지는 길은 교회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것, 인간적이 아니라 신성의 것,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인 것이며, 물질적이 아니고 과학적으로 영적인 것이다. 인간적인 철학, 윤리학, 그리고 미신은, 그것에 의해 인간들이 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떠한 실증 가능한 원리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죄로부터의 탈출이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사도는 말하고 곧 이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립보서 2;12,13)고 덧붙인다. 진리가 왕국으로 가는 열쇠를 제공하였고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이 열쇠로 인간적 깨달음의 문을 열었다. 누구도 억지로 열 수도 없고 다른 문으로 들어 올 수도 없다. 일반적인 가르침들은 물질적이고 영적이 아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오직 영적이고 신성인 것만을 가르칠 뿐, 인간적인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오류가 없고 신성이다; 사물에 대한 인간적 감각은 오류를 범한다 왜냐면 그것은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99:18>
접신론(接神論)이나 심령론이나 최면술을 택하는 개인들은 그들의 잘못된 믿음들을 피하는 사람들보다 더 좋은 성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의 논쟁은 개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체계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리고 노력하고 참기를 계속할 것이다.
건강과 정결과 그리고 자기희생으로 나타나는 참된 영성의 조용하고 강한 흐름들이 인간적 경험을 심화시켜야만 하는데, 물질적 존재에 대한 믿음들이 노골적인 기만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죄와 질병과 죽음이 신성의 영의 과학적 실증과 하나님의 영적이고, 완전한 사람에게 영원한 자리를 내어 줄 때까지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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